해리의 충고를 따르겠다는 말이 진심이었던 모양인지 에그시의 연애사는 한동안 잠잠하다 못해 땅 속 깊숙이 숨어버렸다. 가벼운 데이트를 지양하느라 재깍재깍 저녁이 되면 집에 들어갔더니 동생과 사이가 더 좋아졌다고, 웃음 섞인 투정을 부리는 에그시는 일견 익살떠는 광대처럼 보였다. 해리는 에그시의 넉살을 본 멀린과 퍼시벌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모른척하기 위해 지난 경험들을 되살렸다. 당신이 말할 줄 알았다는 의미가 담긴 것을 웃으며 받아넘기는 행위가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글쎄다. 그렇게 무난한―맡아야 했던 임무의 난이도는 제외하고―일상이 얼마나 지났을까. 에그시가 폭탄선언을 한 어느 날은 모처럼 세계가 한가한 무렵이었다. 본부로 돌아와 마무리한 자신의 임무 보고를 끝낸 킹스맨들 몇이 같이 식사라도 하자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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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 60분 전력 주제: 유년기※공미포 1946자 에그시는 생각했다. 자신의 짧다면 짧은, 20년을 조금 넘긴 삶에서 유년기라 할 수 있을 만한 시기는 얼마나 될까. 아비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뒤 몇 년도 되지 않아 에그시는 아이의 몸에 어른의 인내를 갖추어야 했다. 집에 남은 돈은 없었고 그의 어미는 홀로 스스로를 지탱하기에도 약했다. 에그시는 그녀가 데려온 애인이 제 뺨을 후려친 그 날부터 직감했다. 행복한 어린 시절따윈 개나 주라지. 그렇게 포기하고 살아왔건만, 해리 하트라는 남자가 그때 끊어진 것을 이어 붙였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남자는 에그시를 구원했고, 의지할 수 있게 했고, 미래를 열어주었다. 자신에게 그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려준 것도 해리였다. 그는 마치 아비가 아..
※공미포 2514자 혈기왕성한 청춘은 사랑을 한다. 갓 킹스맨이 된 에그시에게 이 말은 꼭 들어맞는 문구였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타개해야 했던―심지어 정식 요원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첫 임무에서 성공적으로 공주님과 뒹굴었던 것처럼 그의 연애는 자유분방했다. 애인이 없을 때는 불타는 하룻밤을, 사귀기로 한 뒤에도 짧은 만남을 반복하는 그에게 뭐라 하는 사람이 딱히 존재하지 않아 더 그럴지도 몰랐다. 다 자라다 못해 건강한 20대 청년의 사적인 영역을 함부로 지적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어쩌면 가까운 사람들, 예를 들어 가족이나 친구라면 가능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에그시의 어머니 미쉘은 어린 딸, 그의 동생을 돌보느라 바빴고, 그가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
※슈기님께 감사의 의미로 썼습니다. ※공미포 2175자 해리 하트는 소리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관리가 잘 되어 있는 방문은 부드럽게 열렸고, 고도로 훈련된 요원의 걸음은 약간의 자취도 남기지 않고 움직였다. 단단한 구두가 아닌 보드라운 실내용 슬리퍼가 더욱 쉽게 소음을 없애주었다. 임무가 아님에도 이리 조심해가며 해리가 목적한 곳은, 누군가 차지해 중간이 동그랗게 튀어나온 이불로 덮인 침대였다. 남자는 제 것이 아닌 숨소리가 방 안을 채우고 있음을 들었다. 깊게 잠이 든 듯 느릿하고 일정한 호흡은 자정을 넘긴 시간에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그렇게 조용하게, 해리는 침대 바로 옆에서 멈추었다. 도톰한 이불 끝, 베개가 있는 쪽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보다 좀 더 밝은 그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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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3325자※급전개 주의 ※전문적인 상담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채 썼습니다. 죄송... 분명히 말하자면, 멀린이 추천한 의사는 자격 없는 돌팔이가 아니었다. 그는 환자의 진심, 때로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까지 끌어내는 방법을 알았고 늘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지려 애썼다. 그 결과, 그는 지금껏 제값을 못 한다는 평을 들어본 적 없었다. 분명 그랬었다. 상담은 어디까지나 환자 본인이 자각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한다. 대상의 사소한 말 하나에도 실마리가 있을 수 있으며… 사각이던 펜 소리가 멈췄다.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여태 믿고 있던 바를 적어 봐도 답답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 그가 최근 맡게 된 남자 때문일 터였다. 주변인들에 의해 오게 되었다는 남자, 미스터 언윈. 의사는 ..
공미포 2990자※마지막 시험 내용이 영화와 다릅니다. 멀린은 킹스맨 멤버 대부분의 신뢰를 얻은 남자였다. 사실 그들이 가끔 뒤치다꺼리를 부탁하기 편해지고자 그렇게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했지만, 멀린은 언제나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 동료들을 보조했다. 단순히 몸으로 뛰어서 하는 것만이 만사가 아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사전 조사를 하고, 더욱 수월하게 잠입할 수 있게 임무 내내 모니터링을 하고, 요원이 지령을 완료한 뒤 누구도 킹스맨의 자취를 쫓을 수 없도록 흔적을 지우는 것까지, 보다 광범위한 작업이 뒷받침되어야만 임무의 성공 여부가 갈렸다. 멀린은 자신의 칭호에 걸맞게 마법 같은 실력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간혹 현장의 열기에 드물게 도취된 동료에게 한 발 물러선 자리에서 이성적인 도움을 주..
킹스맨 전력 60분주제: 화이트데이 공미포 1801자 “해리는 단 거 좋아해요?”“…싫어하진 않지.” 병원 침대에 누운 중년의 남자의 옆에 앉아있던 청년이 돌연 질문했다. 임무가 아닐 때면 언제나 옆에 데리고 다니던 개, JB까지 떼놓고 왔길래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싶었던 남자의 우려를 장렬히 빗나간 물음이었다. 단 걸 좋아하는 건 오히려 에그시 네가 아니었나? 내 기억으론 푸딩부터 시작해 온갖 스위츠를 섭렵했던 것 같은데. 안경을 고쳐 쓰며 남자, 해리는 에그시와 눈을 마주했다. 해리 하트는 리치몬드 발렌타인의 음모에 휘말려 머리에 총을 맞았다. 죽음이 그를 찾았음이 너무도 확실했기에 모두가 추모의 눈물을 흘린 것이 무색했다는 것을 에그시가 알게 된 때는, 청년이 겨우 세상을 구해낸 이후로 몇 달이나 ..
공미포 2594자※마지막 시험 내용이 영화와 다릅니다. 게리 에그시 언윈이라는 인간의 생에서 기적을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해리 하트로 완전하지 않을까. 에그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은 자신의 능력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어둑한 밤바다에서 단 하나의 등불조차 없는 것 같은 과거, 그 웅덩이에서 꺼내준 사람이 해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했다. 에그시는 그에게 감사했고, 그를 존경했다. 에그시는 해리가 원하는, 그의 새로운 동료가 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느끼는 바를 옳게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새로이 밟은 인생의 토대 밑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고만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삶이란 것은 만만치 않았다. 아니면 빌어먹게도, 에그시 자신에게 원한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