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시는 생각했다. 자신의 짧다면 짧은, 20년을 조금 넘긴 삶에서 유년기라 할 수 있을
만한 시기는 얼마나 될까. 아비가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뒤 몇 년도 되지 않아 에그시는 아이의 몸에 어른의 인내를 갖추어야
했다. 집에 남은 돈은 없었고 그의 어미는 홀로 스스로를 지탱하기에도 약했다. 에그시는 그녀가 데려온 애인이 제 뺨을 후려친 그
날부터 직감했다. 행복한 어린 시절따윈 개나 주라지.
그렇게 포기하고 살아왔건만, 해리 하트라는
남자가 그때 끊어진 것을 이어 붙였다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다. 남자는 에그시를 구원했고, 의지할 수 있게 했고, 미래를
열어주었다. 자신에게 그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려준 것도 해리였다. 그는 마치 아비가 아이의 손을 잡고 살아가듯,
에그시에게 하나하나 자상하게 세상을 가르쳤다. 에그시는 마치 유년기를 다시 보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졌다. 잠깐에 불과했지만.
변질되었다는 것을 안 것은 존경하는 이를 상대로 꿈을 꾼 날이었다. 에그시는 잠에서 깨어 양손을 얼굴에 댄 채 신음했다. 조금
줄어들었다고 생각한 욕설이 절로 입에서 나왔다. 울고 싶기도 했고, 불특정한 누군가를 향해 화를 내고 싶기도 했다. 에그시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한 가지를 분명히 결심했다. 절대 아무에게도, 특히 해리에게 말하지도, 들키지도 말 것.
그
결정은 현명한 축에 든 것 같았다. 자각한 뒤 그럭저럭 숨기는 것에 익숙해졌을 무렵, 에그시는 해리와 멀린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멀린이 당신이 유달리 에그시를 아끼는 것 같다고 하자, 해리는 대답했다. 그 아이는 제대로 어린 시절을 보낸 적이 없을
거라고, 그것은 자신 때문이니 보상하는 게 마땅하다고.
에그시는 바로 엿듣는 것을 그만두고 뛰쳐나갔다. 복도를 지나 열린 방 중
아무 곳 하나를 정해 들어가 문을 닫고, 잠그려 했다. 불행히도 그의 다급한 움직임은 성공하지 못했다. 쫓아온 남자가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완력 차이는 분명했고, 에그시는 그렇게 해리와 마주했다.
누가 먼저 말을 할지
가늠하는 찰나가 지나고, 에그시는 해리가 말하기 전에 선수를 쳤다. 분명 모든 것을 비밀로 하고 그가 주는 것을 누리자 했었는데,
어쩐지 확인받은 지금 와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더듬거리며 시작한 말은 끝에 가서는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소리치는 것으로
바뀌었다.
“훔쳐 들어서 미안해요, 하지만 문을 잠그는 게 좋았을 텐데요. 내 아버지 대신이라도 되고 싶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는데.”
“에그시, 나는―”
“당신이 내게 주고 싶었던 건, 내 아버지가 죽으면서 잃어버린 거라는 걸! 듣기 전에도 알고 있었다고요!”
에그시가 해리에게 품은 것은 십 대 시절 여자친구가 즐겨 읽던 연정 소설에 나올 법한, 그런 완벽한 사랑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동료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연인에게 바랄 모든 것을 뭉친 감정이 질척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에그시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말라 있었을 피부가 축축해졌다. 코를 훌쩍였다. 이 와중에도 해리에게 못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걸로는 부족해요. 부족하다구요. 그러니 이제 그만 둬요. 배은망덕한 나 같은 놈, 무시해버려요.”
에그시는 알았다. 영민한 해리 하트라면 이 정도 말만으로도 전부를 알아챘을 것이다. 청년은 쓰게 웃었다. 이제 어린애에서 졸업이야.
어리광부리는 것도 못 하겠지. 에그시는 해리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한 채, 가보겠다며 먼저 등을 보였다.
“에그시.”
저의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가 여전히 감미로웠으나, 에그시는 멀어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다. 실연이라는
단어도 붙일 수 없는 끝이 비참했다. 한동안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스스로가 눈에 훤했다. 더 큰 문제는 그 한동안이 얼마나
갈지였다. 해리 하트가 남긴 것을 지우려면 아주 오래 걸릴 텐데. 심지어 완전히 그럴 수 있다는 확신도 들지 않았다.
“에그시, 날 보렴.”
크고 단정한 손이 청년의 어깨를 잡아 멈춰 세웠다. 거부하려는 몸을 강제로 돌리더니, 그대로 입술이 맞닿았다. 에그시는 굳어버렸다.
저항 같은 건 더이상 하지도 못할 만큼의 노련하고 열정적인 키스가 이어졌다.
마침내 둘의 얼굴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졌을
때, 에그시는 자신이 제대로 서 있기는 한 건지도 의문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해리가 허리를 단단히 감아 붙들어 맸기에 키스 후 주저앉는 꼴불견은 면한 것이 다행이었다.
“내가 네게 잃어버린 것을 주고 싶다는 건 맞단다. 거짓은 없어.”
해리는 자유로운 다른 한 손으로 에그시의 번들거리는 입가를 닦아주며 입을 열었다. 열기를 띤 숨결과 함께 입술에 닿은 손가락 촉감이 좋다 못해 무서워 부들거리는 에그시를 내려다보는 눈이 잔잔했다.
“하지만, 하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게 더 있지.”
“…뭔데요?”
“만약 네가 나와 같은 것을 바란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전시키겠다고.”
방금 우리가 했던 것과 같은 종류를 말이다. 에그시는 그 말을 듣자마자 멎어가던 울음이 다시 터져버렸다. 그대로 해리의 목을
끌어안은 채 엉엉 울며, 에그시는 몇 번이고 확인했다. 정말이죠? 정말인 거죠? 해리는 그런 그를 토닥이며 안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