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말하자면, 멀린이 추천한 의사는 자격 없는 돌팔이가 아니었다. 그는 환자의 진심, 때로는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까지 끌어내는 방법을 알았고 늘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지려 애썼다. 그 결과, 그는 지금껏 제값을 못 한다는 평을 들어본 적 없었다. 분명 그랬었다.
상담은 어디까지나 환자 본인이 자각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한다. 대상의 사소한 말 하나에도 실마리가 있을 수 있으며… 사각이던 펜 소리가 멈췄다. 의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가 여태 믿고 있던 바를 적어 봐도 답답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 그가 최근 맡게 된 남자 때문일 터였다.
주변인들에 의해 오게 되었다는 남자, 미스터 언윈. 의사는 지금껏 그와 몇 번의 상담을 진행했는지를 세어 보았다. 2주에 한
번씩, 총 6번의 대화를 나누었다. 또 의사는 내담자가 한 번에 얼마를 지불하고 자신의 앞에 앉으러 오는지도 생각했다. 능력과 보수는
비례한다는 자본주의의 원칙은 모든 학문과 산업, 인류 자체를 지배했고 자신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스터 언윈은 쉽게 내주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와의 대화는 기묘한 산책길을 연상시켰다.
말끔히 포장되어 발을 내딛기 쉬우나 따라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본래 가고자 했던 곳이 어딘지 몰라 당황하게 되는, 그런
길이었다. 남자는 솔직히 답하되 본질을 보게 해주지 않았다.
그는 미스터 언윈과의 상담에서 높은 벽을 두드리는 기분을 받기도 했다. 두껍고 단단한 재질로 이루어진 벽은 굳건했다. 의사는
천천히, 벽의 표면을 두드리며 숨겨진 것을 찾았다. 그것은 가느다란 금일 수도 있고 또는 가려진 문일 수도 있었다. 의사는
집중했고, 지금까지 손을 댄 부분에는 그것이 없었음을 인정했다.
유쾌하게 어깨를 으쓱이던 남자의 안에 무엇이 있기에 이렇게나 돌아가야 하는 걸까. 의사는 조금 막막했다. 직업 정신과 더불어 가장
최근의 상담에서 잡은 하나가 아니었다면, 그는 어쩌면 자신의 고명한 스승에게 미스터 언윈을 떠넘겼을지도 몰랐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는
어린아이가 자신의 문제를 부모에게 해결해달라고 떼쓰는 마음과도 비슷했다. 아직 철이 덜 들었나.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해 조소했다.
의사는 자신을 가르치고 이끌어준 스승을 존경했고 흠모했다. 마땅히 가져야 할 애정 또한 가지고 있었다. 스승의 업적을 떠올리던
의사는 상담 시간 동안 메모한 것들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다. 어린 나이에 잃은 아버지, 불우한 가정환경, 절망, 설익은 반항심과
체념의 과거를 미스터 언윈은 담담히 풀어놓았다. 이것은 그다지 문제가 아니라는 듯한 가벼운 어조였다. 그가 입고 있던 단정한
정장과 잘 빗어 넘긴 머리에서 풍기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과거는 그렇게 ‘별것 아닌’ 것이 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그렇게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준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람에 대해 말하는 미스터 언윈의 눈은 반짝였다. 잠을 이루지 못해
생긴 남자의 눈가 밑 그늘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지만, 이라며 운을 뗀 남자는 그의 기억 속 사람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그것은 찬사가 맞았다. 그 사람에 대해 몇 가지 단점이라 생각한 것들을 늘어놓은 뒤 바로 변명과 반박을 잇는
모습은, 남자가 얼마나 그 사람을 자랑스럽게 여겼는지를 보여주었다. 의사는 자신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다며 웃어 보였다.
‘지금도 매년 직접 쓴 크리스마스카드를 주고받곤 하죠.’
자신이 의미 없이 맞장구치듯 덧붙인 말이 실수였다는 것을 의사는 조금 늦게 깨달았다. 미스터 언윈은 입을 다물었다. 다시 열린
입은 이것저것 밀도 얕은 문장들을 꺼낸 뒤, 시간이 다 된 것 같다며 나가고 싶다는 뜻을 드러냈다. 남자의 주변으로 안개같이 서려 있던
경계가 다시 두터워졌다. 공격을 막기 위한 갑옷 같은 그것은 이전에 쌓은 벽과는 성질이 달랐다. 의사는 그제야 자신이 찔러야 할 곳이 어딘지 알았다. 한
번에 따지 못한 열매를 거두기에는 당장 세운 가시가 보였다. 의사는 남자에게 다음을 기약했다.
그는 회상을 멈추고 옆에 놓인 달력을 힐끔 보았다. 내일이 일곱 번째 만남이다.
*
이제는 익숙할 법도 한 의자에 에그시는 어색하고 딱딱하게 앉아 있었다. 마치 처음 이곳에 왔던 것과 같은 태도였다. 의사는 그런
남자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는 에그시에게 지난 대화를 이으라 말하지 않은 채, 날씨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을 열었다. 일 년 중
삼 분의 이 이상이 그러하듯, 오늘도 비가 올 것 같다며 의사는 자연스럽게 에그시의 옆에 놓인 장 우산을 가리켰다. 우산에
관련해 그를 가르쳤던 교수, 스승이라 여기는 이와 겪은 사소한 일과를 짧게 요약해 말하는 의사의 얼굴은 잔잔했다.
에그시는 불편했다. 그의 눈에 비친 의사는 편안해 보였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단어가 아닌, 정확히 정의한 상대의 추억이 어딘지 모르게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 에그시는 굳은 표정으로 의사의 말을 끊었다. 무례한 태도임을 잘 알았으나, 그는 굳이 멈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신의 심기를 드러낸 에그시의 말은 뾰족했다.
“실례. 그 정도면 충분히 들었다고 생각하는데요, 닥터. 굳이 여기서 그 얘기를 꺼내는 것으로 보아, 전에 우리가 했던 주제를 이어나가고 싶은 거겠죠?”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미스터 언윈 스스로도 느끼고 계실 것 같은데요.”
본인이 지금까지와 다르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요. 의사는 부드럽게 정곡을 찔렀다. 저는 당신을 돕기 위해 여기 있는 겁니다.
불면증의 원인은 다양하고 사람마다 다르지만, 저는 미스터 언윈의 그 사람이 증상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고 보고 있습니다.
의사의 말에 에그시는 미간을 좁혔다. 그건 닥터가 혼자 그렇게 여기고 있을 뿐인 게 아닐까요. 에그시의 저항은 단호한 의사의
태도에 막혔다. 이것은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상황이었다. 쫓고 쫓기는 거리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
사람’에 대해 파고들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상담 역시 지금까지처럼 무의미해질 거라는 말을 끝으로,
의사는 기다렸다. 에그시는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때로 입을 다무는 것이야말로 상대의 입을 열게 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될 수 있음을, 지금 여기의 두 명 다
알았다.
“빌어먹을, 망할… 좋아요. 알겠다고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나에게, 단순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스승, 은인, 이상향. 에그시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듯 더듬더듬 뱉어냈고, 어느 순간 이후로는 단어를 꺼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는
아예 고개를 숙이고 무릎에 팔꿈치를 대었다. 그리고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의사는 그런 모습이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신도의
그것이라고 느꼈으나, 지적하지 않았다. 어린 양은 죄를 고했다. 어딘지 물기가 어린 소리였다.
“나는, 앞에서 짜증내기도 했고 일부러 화나게 만들 때도 있었지만, 그 사람을 보면, 그냥, 그냥 좋았어요. 좋았는데.”
“…….”
“아니, 아니에요. 그냥 존경일 거예요. 그래야 한다고요.”
“미스터 언윈.”
“나에게 실망할 거예요.”
의사는 머리를 살짝 앞으로 숙였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실망할 법한 감정이, 제가 이해한 쪽이 맞을까요. 그러니까, 연애감정 같은.
에그시는 답하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다는 공기가 훅하고 밀려왔다. 의사는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예상치 못한 방향의
토로는 의사에게서 반쯤 사무적인 위로가 나오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털어놓은 사람을 향한 안쓰러움이 섞인
종류였다. 에그시는 움직임 없이 고정된 채 떨고 있었다. 본인 스스로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의 그 사람은, 미스터 언윈이 좋아해서는 안 되는 상황인가요? 기혼이라거나…”
“남자라고요. 씨발, 같은 거 달린! 내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았고, 결혼은 했는지 애라도 있었는지 하나도 모르지만 혼자 살았고, 그리고,”
죽어버렸어요. 완전히 가버렸다고요! 이를 악문 채 불분명한 발음으로 시작한 답은 끝에 가서는 있는 힘껏 내지른 것이 되었다.
소리치는 것에 기력을 쏟아 부었는지 숨을 헐떡이는 남자의 얼굴이 붉었다. 그는 어느새 대고 있던 손을 뗀 채였다. 의사는 잠시
상대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에그시는 작게 반복했다.
“아니라고요. 아니어야 해요. 꿈에서 만날 때마다, 해리가 경멸하니까. 화를 내지도 않고, 죄송하다고 말도 하지 못하게 하는데. 변명도 들어주지 않아요.”
의사는 그제야 에그시의 그 사람이 해리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 그리고 자신의 내담자는 잠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잠을 자지 않기
위해 노력해온 것임을 알았다. 의사는 남자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상대가 말을 꺼내도록 하기 위해 입을 다문
것과는 다른 종류의 침묵이 흘렀다. 공감하되 기준을 잡아야 하는 것이 의사가 생각하는 본인의 역할이었다. 이를 위해 강렬한 파도에 잠식당하지 않으려 버티는
동안,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는지 의사의 팔에 걸린 펜이 책상 밑으로 떨어졌다. 물체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