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기왕성한 청춘은 사랑을 한다. 갓 킹스맨이 된 에그시에게 이 말은 꼭 들어맞는 문구였다. 절체절명의 위기를 타개해야 했던―심지어 정식 요원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첫 임무에서 성공적으로 공주님과 뒹굴었던 것처럼 그의 연애는 자유분방했다. 애인이 없을 때는 불타는 하룻밤을, 사귀기로 한 뒤에도 짧은 만남을 반복하는 그에게 뭐라 하는 사람이 딱히 존재하지 않아 더 그럴지도 몰랐다. 다 자라다 못해 건강한 20대 청년의 사적인 영역을 함부로 지적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어쩌면 가까운 사람들, 예를 들어 가족이나 친구라면 가능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들어올 수도 있을 것이다. 답은 간단하다. 에그시의 어머니 미쉘은 어린 딸, 그의 동생을 돌보느라 바빴고, 그가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에 대해 세심하게 묻기에는 이미 서로가 애정에 기반한 무관심에 익숙했다. 그저 함께 있는 시간에 적당히 포장된 일과를 이야기하며 가족애를 다지는 게 전부였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자면, 설사 미쉘이 에그시의 사생활을 궁금해하더라도, 그녀가 딘과 헤어진 뒤 경제적으로 아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지금은 무리일 터였다.
친구의 경우는 어떨까. 에그시의 흑역사를 함께 했던 골목의 친구들은 오히려 그의 화려한 연애사를 부러워했다. 남자 중의 남자라며 추켜세우고, 지난밤 상대의 몸매는 어땠는지 등등의 음담패설을 뱉고는 경박하게 낄낄거리는 그들에게 진중한 충고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들과 종류가 전혀 다른 친구인 록시의 경우도 신통치 않았다. 록시는 잘 교육 받은 명문가의 영애답게 가끔 에둘러 에그시의 연애 기간의 문제점을 찌르곤 했지만, 그가 가볍게 웃어넘기는 수준 이상은 넘지 못했다. 언제 한 번 에그시가 네 연애사는 어땠길래 그런 말을 하느냐며 묻는 것을 어물거리며 수습하느라 진땀을 뺀 이후로는 더 그랬다. 여자의 과거는 묻는 게 아니야. 록시가 그때 했던 말이다.
그렇다면, 해리 하트는?
에그시와 해리의 관계는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둘은 발렌타인 사건 이후 돌아온 해리가 아서의 자리에 앉게 된 뒤로 추천인과 후보생에서 상사와 부하 정도로 바뀌었다. 해리는 에그시를 나락에서 구한 은인이었으나 에그시가 밑바닥을 구른 이유가 친아버지의 이른 부재 때문이었고, 그 부재를 해리의 실수가 초래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다지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다. 즉 둘은 친구도, 가족도, 그러나 단순한 동료도 아니었다. 애정사에 훈수를 두기에는 미묘하게 부족한 사이.
“현명하지만, 어리석어.”
해리가 이처럼 에그시에게 지적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을 때, 평소 임무를 제외한 동료의 사정에는 관심 없기로 유명한 퍼시벌이 한 말이었다. 해리에게 질문을 던졌던 멀린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해리는 다소 추상적인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으나, 부러 파고들지 않았다. 한창 꽃을 피워내고 잎을 푸르게 물들이는 젊은 날을 뒤로한 채 삶의 가을에 들어선 이들의 통찰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멀린이 그래도 한 마디 정도는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에그시의 전 애인들 중 두엇이 앙심을 품은 것 같다며 조언했다. 킹스맨에게 그 정도의 문제야 별 큰 일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의 모두가 알았음에도 굳이 그 말을 한 이유는 분명했다. 해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등을 돌려 걸어나갔다.
“해리!”
“에그시.”
입을 다무는 것을 끝으로 멀린과 헤어져 본부를 나오던 해리는 에그시와 마주쳤다. 반갑다는 뜻을 감추지 못하고 뛰어오는 에그시는 그야말로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고무공 같았다. 통통 튀고, 예측할 수 없고, 차분하지 않으나 기분을 좋아지게 한다는 의미에서. 해리는 유쾌해진 티를 내지 않은 채 청년에게 신사는 함부로 뛰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고, 에그시는 하지만 해리 당신이잖아요? 라는 물음표로 남자를 가볍게 미소 짓게 하는 것에 성공했다.
“오늘 시간 괜찮아요? 임무 없어요?”
“네가 짐작한 게 맞을 거란다.”
“Yes, 운이 좋네요! 벌써 식사 시간인데, 같이 저녁 어때요? 전에 제인이랑 간 데가 되게 맛있었는데.”
자기가 추천한다고 해서 갔는데, 간지러운 음악을 틀어대긴 했지만 좋았거든요. 눈빛을 반짝이며 제 대답을 기다리는 에그시를 보며 해리는 맥주 거품이 조금씩 가라앉듯이 잔잔해졌다. 괜찮은 제안이구나. 해리는 원하는 말을 들은 에그시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았다. 상쾌하고 푸른, 박하 향이 날 것 같은 새하얀 기쁨이었다. 같이 가자며 몸을 돌리는 청년의 싱그러움이 남자의 팔을 붙들었다. 둘은 서로의 옆에 선 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당으로 향했다.
*
에그시와 데이트를 했다던 여자의 안목은 꽤 훌륭했다. 해리는 냅킨으로 입 주변을 가볍게 두드리며 에그시가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홀짝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식사하는 도중에도 재잘대던 상대의 입은 먹거나 마실 때만 잠잠했다. 그것을 제외한다면 나무랄 데 없는 식사 예절을 보인 아이가 자랑스럽다니, 해리는 이것이 부성애라는 것일까 잠시 생각했다.
해리 자신이 에그시를 아끼는 것은 어느새 주변 사람들에게도 당연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반복하기를, 누군가를 친애한다는 사실이 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할 권리를 주지는 않는 법이다. 빚을 갚는다는 이유로 청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남자가 주장하기에는 조금 뻔뻔한 상식이긴 했지만.
“에그시, 신사라면 사랑을 남발하지 않는 게 매너지. 최근 시끄럽더구나.”
그랬기에 해리는 약간의 충고로 끝내고자 했다. 절대 동료들의 권유를 따르기로 한 것이 아니었다.
“엑, 록시가 뭐라 하라고 그랬어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만나고 헤어졌을 뿐인데!”
“그렇다면 그 마음에 조금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듣자 하니 네 쪽에서 울린 비율이 훨씬 높다던데 말이지.”
“기껏 맛있는 거 먹고 훈계 듣는 건 질색이라고요. 해리니까 오케이지만…. 알았어요, 알았어. 그렇게 보지 마요. 앞으로 적당히 할게요.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럼 되죠?”
“Good boy.”
에그시는 해리의 엄한 표정에 약했다. 지지 않으려 도발하려 들다가도 금방 기세를 수그리고 용서를 구하는 패턴은 글쎄, 그를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해리는 부러 굳힌 입가의 힘을 풀고 웃어주었다. 에그시가 제 얼굴을 보며 안심한 듯 따라 웃는 모습이 기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