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에그시 언윈이라는 인간의 생에서 기적을 말해야 한다면, 그것은 해리 하트로 완전하지 않을까. 에그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은 자신의 능력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어둑한 밤바다에서 단 하나의 등불조차 없는 것 같은 과거, 그 웅덩이에서 꺼내준 사람이 해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했다.
에그시는 그에게 감사했고, 그를 존경했다. 에그시는 해리가 원하는, 그의 새로운 동료가 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느끼는 바를 옳게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새로이 밟은 인생의 토대 밑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으려고만 노력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삶이란 것은 만만치 않았다. 아니면 빌어먹게도, 에그시 자신에게 원한이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마지막 시험에서 먼저 지령을 완료했던 건 분명 에그시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폭발, 그것이 모든 전개를 뒤흔들었다. 폭발은 더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으로 청년을 택하지 않았다. 믿음직하고 사려 깊은, 다정한 록시. 에그시는 함께 최종 후보로 남은 그녀가 굉음과 함께 부서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비록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얼마나 굉장한지는 물어보지 않았다–그와는 백팔십도 다른 길을 걸어왔을 게 분명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아꼈다.
에그시는 자기 자신에게서 가능성을 볼 만큼 현명하지는 못했으나, 소중한 친구를 위험에서 내버려둔다면 결코 남은 삶이 행복하지 못하리란 것은 잘 알았다. 그는 위험에서 록시를 감싸 안았다. 보호하듯 올라탄 몸에 쏟아진 통증을 제대로 느끼기 전. 에그시의 기억은 거기서 잠시 끊어졌다.
조금 시간이 흐른 나중에 와서, 그는 그것이 다행이었다고 여겼다. 더럽게 아파서 울기 전에 기절해버린 덕분에 여자애 앞에서 훌쩍이는 꼴은 면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수컷의 허세란 눈물겨웠다.
*
심연의 끝자락에서 정신을 붙잡고 눈을 떴을 때, 에그시는 깨질 듯한 두통을 느꼈다. 저절로 미간에 골이 파였다. 그는 괜찮으냐고 물어오는 록시와 멀린에게 대답하려 입을 열었다. 꼭 지랄맞은 누군가가 총으로 머리를 쏜 것 같은데— 여기까지 말했을 때, 에그시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의 경악한 얼굴을 보아 확신하건대, 제 앞의 두 사람 또한 듣지 못했을 것이었다. 멀린이 급히 의사를 부른 사이에 록시는 더듬거리며 에그시, 라고 몇 번을 부르다 입을 닫았다.
호출을 받고 들어온 의사는 병실 안 세 사람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고, 에그시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진단을 알려주었다. 멀린과 록시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것을 들었으나 에그시는 한 귀로 흘렸다. 의사가 뭐라 이야기를 해도 그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말을 해봐도 그저 픽픽대는 숨만 나오는 목이라니, 생전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상상이나 했던가.
에그시는 병원 침대에 누운 채 평소 노력해도 숨기지 못하던 욕이 떠오르지도, 말하고 싶지도 않음을 의아해할 뿐이었다. 그는 지금 절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감각이 가득 고여 있다는 것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문을 열고 해리가 들어왔다.
반가움을 느끼기도 전에, 에그시는 해리가 제가 기억하던 모습과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살짝 흐트러진 해리의 정장 차림이나 후각에 밀려온 먼지와 화약 같은 비일상의 냄새 때문은 아니었다.
에그시는 해리의 눈이 낯설었다. 그는 마치 에그시를 모르는 사람처럼 보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빠진 채 걷다가 돌연 부딪힌 낯선 이를 확인하며 짓는, 심연에서 빠져나와 겨우 타인을 인지한 그런 것. 에그시는 해리가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그래서 조금 전에 겪은 일을 잊은 채 상대를 불렀다.
해리. 해리 하트. 침묵으로 수 놓인 이름은 차가웠고, 그 냉기를 전해 받은 이의 얼굴은 표정이 없었다.
*
가엾게도.
에그시가 앞으로 내밀어 진 손을 잡자 해리가 한 말이었다. 에그시는 당연히 자신에게 한 말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확신하지는 못했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맥락이 들어맞았고 온전히 그렇다 하기에는 가벼웠다. 해리는 늘 확실한 말을 해 왔었다. 에그시는 거기에 반발할지언정 모호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것은 검증된 수학 공식처럼 둘 사이에 자리 잡은 대화의 규칙과도 같은 것이었다. 묵인해온 것이 처음으로 어긋났다. 청년은 이것이 얼마나 더 비틀릴 수 있는지 몰랐다.
“당분간은 나와 함께 지내자꾸나.”
그 무지(無知)가 해리의 말을 바로 거절하지 않게 했다. 네 상태를 모친이 알게 되면 분명 크게 걱정하지 않겠니. 목소리가 돌아올 때까지, 하다못해 기억이 안정될 때까지는 잠시 시간이 필요할 거란다. 차분하게 설득해오는 해리에게 멀린이 동조했다. 록시는 갤러해드에게 신세 지는 게 싫다면 자신도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차례를 넘기며 논리로 무장해 공격해오는 언어의 향연에, 에그시는 결국 두 팔을 들어 항복했다. 말로는 못 당하겠어요. 킹스맨의 자질에는 얼마나 혀를 잘 터는지가 포함되나.
에그시가 허락하자 멀린은 해리와 잠시 시선을 주고받았다. 무언의 합의가 끝났는지, 멀린은 록시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당분간 같이 지내자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도 있나보다고 에그시는 생각했다.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킹스맨은… 유감이구나.”
“…….”
하긴 그렇겠지. 에그시는 납득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담담했다. 목소리의 문제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될 것 같았다는 이 예감이 내내 붙어서 숨어있다 튀어나온 것에 가까웠다.
에그시는 비밀 스파이 조직의 후보가 되는 일부터, 아니, 해리가 준 메달을 간직하게 되어 전화기의 버튼을 누르는 것부터 꿈에서도 나오기 힘든 일임을 알았다. 모든 것이 영화의 주인공이 겪을 법한 일이 맞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하는 주인공과 달리, 자신은 완벽히 실패했다는 것뿐이었다.
바닥을 기던 인간에게는 멸시라는 낙인이 찍힌다. 그것은 외부에서 오는 것과 동시에 자기 자신이 후벼 파고 새기게 되는 것으로, 좋은 옷을 입게 되고 태도를 교정받는다고 해서 온전히 씻어질 것이 아니었다. 남아있는 잔재가 지워지지 않는 오물처럼 속에 남아 절망보다는 체념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 청년이 머물던 세계였다.
이것이 바로 해리와 자신이 다른 점일 거라고 에그시는 생각했다. 보다 풍요롭게 살아온 사람이 이런 일을 겪게 된다면 분명 분노하고 한탄할 테지만, 자신은 이리저리 굴러보았기에 오히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고 여기고 있지 않은가.
“네 어머니와 동생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네가 내 집에 머무는 동안, 그들은 불편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을 거란다. 네 계부는 당분간 혼자 있어야겠지. 맡겨 두렴. 조심스럽게 어깨를 토닥이는 해리의 손에 에그시는 머리를 기댔다. 믿음직한 말에 안심이 되었는지 나른하고 피곤해졌다. 에그시는 눈꺼풀을 닫았다. 그렇게 무모할 정도로 활기 넘치던 청년의 긍정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 채, 둘은 함께 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