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의 충고를 따르겠다는 말이 진심이었던 모양인지 에그시의 연애사는 한동안 잠잠하다 못해 땅 속 깊숙이 숨어버렸다. 가벼운 데이트를 지양하느라 재깍재깍 저녁이 되면 집에 들어갔더니 동생과 사이가 더 좋아졌다고, 웃음 섞인 투정을 부리는 에그시는 일견 익살떠는 광대처럼 보였다. 해리는 에그시의 넉살을 본 멀린과 퍼시벌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모른척하기 위해 지난 경험들을 되살렸다. 당신이 말할 줄 알았다는 의미가 담긴 것을 웃으며 받아넘기는 행위가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는, 글쎄다.
그렇게 무난한―맡아야 했던 임무의 난이도는 제외하고―일상이 얼마나 지났을까. 에그시가 폭탄선언을 한 어느 날은 모처럼 세계가 한가한 무렵이었다. 본부로 돌아와 마무리한 자신의 임무 보고를 끝낸 킹스맨들 몇이 같이 식사라도 하자며 모인 그 순간, 생명의 음모도 생명의 위협도 없는 대신 청년은 딱 한 마디를 꺼냈다.
“저 결혼할 거예요.”
공기가 술렁였다. 멀린이 마시던 커피잔을 떨어뜨릴 뻔 하고, 록산느가 경악한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나려다 실패해 꼴사납게 다시 앉는 추태를 보일 때, 해리만은 멀쩡해 보였다. 정확히는 그대로 굳어버렸다는 말이 맞았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 물음표와 느낌표가 가득해졌다. 짧은 침묵이 흐르고, 에그시와 나잇대가 비슷한 친구라는 이유로 암묵적인 총대를 맨 랜슬롯, 록산느가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질문했다.
“누구랑 한다는 거야? 요즘 만나는 사람 있었어?”
“응. 재클린 로콜이라고, 만난 지 한… 세 달 되었을걸.”
“맙소사. 그 사람은 고작 몇 달 만에 청혼을 받아준 거야?”
“아직 프로포즈는 안 했어. 조만간 할 거지만 말야. 나 진짜 진지하니까 응원해달라는 의미? 여기 멤버들 다 사람 꼬시는 데 일가견 있다는 거 아니까, 도와달라는 것도 있고.”
절대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 양 손을 모으는 제스처와 함께 유쾌한 윙크를 날리는 청년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져 있었다. 이전의 만남처럼 건조하거나 애매한 기미라고는 조금도 없는, 들뜬 홍조가 볼에 어렸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은 짧게 감탄했다. 저거 정말이구나.
이윽고 누군가가 시작한 가벼운 박수가 몸뚱이를 불렸다. 킹스맨들은 에그시와 마주 웃으며 때 이른 덕담을 건넸다. 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나, 꼭 성공해라, 유혹의 노하우를 알려주겠다 등등. 세계를 구한 청년이 어느새 우아한 비밀조직 안에서도 동료들에게 괜찮은 수준의 호감을 얻은 상태였기에 가능한, 약간의 친밀함을 담은 말들이었다. 에그시는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그시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닿은 사람은 그때까지도 멎은 몸을 풀지 못한 남자였다. 아직 경험이 부족한 신입 둘을 제외한 나머지 요원들은 눈짓으로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충격 받은 거 맞지? 그런 것 같은데. 세상에, 저 인간이 저렇게 놀란 건 최소 십 년 전의 일 아냐? 어린 갤러해드가 제대로 일을 냈군.
“음, 아서?”
“…그녀는 좋은 사람이겠지?”
“물론이죠! 저, 결혼하고 싶을 정도인 건 처음이라고요. 그녀는 완벽해요.”
아이가 부모의 눈치를 보듯 제 이름을 확인하듯 부르는 에그시에게, 해리는 천천히 입을 열어 축하했다. 기어코 남자에게서 잘 해보라는 말을 끌어낸 에그시는 전보다 더욱 밝아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그래도 데이트가 있어서요. 회의 끝났죠?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고는 바삐 나가는 청년의 걸음에는 갓 봉오리를 피워낸 꽃의 첫 만개가 묻어 있었다. 그 설렘, 그 기쁨. 보는 사람에게 절로 전해지는 향기였다.
록산느는 한시라도 빨리 랜슬롯이 아닌 에그시의 친구 록시의 시간이 되어 추궁할 생각에 퍼시벌과 멀린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른 동료들은 우리의 어린 갤러해드의 연인에 대해 캐물어오라는 농담으로 록산느를 격려했다. 그렇게 다양한 생각이 오고가며 새로운 소식에 한껏 들뜬 분위기 속에서, 가장 상석에 앉은 남자는 조용히 손목의 시계를 만지작거렸을 뿐이었다.
*
해리 하트는 지각을 대수롭지 않게 하는 남자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철두철미하지 못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단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을 뿐이지 해리는 시간이 어디에 발자취를 남기고 얼마나 멀리 달려 나가는지를 명확히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제 짝을 찾았다는 선언을 한 그 날 이후, 에그시가 프로포즈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오늘까지 3개월하고도 12일이 지났음을 계산할 수 있었다. 굳이 세어보지 않아도 어째선지 정확히 머릿속에 남은 숫자였다.
놀랍게도 에그시의 그녀는 몇 년을 두고 보며 재곤 하는 요즘 세태를 따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것이 로맨틱한, 혹은 성급한 결정이라 생각하며 해리는 왜 자신이 실수를 늘려가는지에 대해 외면하려 들었다. 공무에서 일을 망치지 않은 것이 용할 정도로 그는 그답지 못했다. 다행인 것이 하나 더 있다면, 해리의 부주의가 지극히 사소한 것으로 드러났기에 그의 주변은 모르거나 혹은 알아차려도 입을 다물었다는 것이었다. 전자는 남자에게 아서의 역할 이상을 기대하지 않았고 후자는 끼어들 수 없다에 가까웠다.
해리는 가장 가까운 우정을 나누고 있다는 빌미로 그 여자를 만나고 온 랜슬롯이 본부로 돌아와 자신을 마주한 날, 저를 보며 미처 당황을 가다듬지 못한 것을 보았다. 그 미묘한 표정은 재클린 로콜이라는 여자에 대한 조사 결과를 알려주던 멀린과 일견 닮아있었다. 부러 수상한 요소가 존재하는지 여부만을 전해 들었기에, 해리는 여자의 얼굴도 성격도 알지 못했다. 그에 더하여 해리는 결혼 전 재클린을 꼭 한 번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에그시의 요청을 미루고 거절했다. 청년의 얼굴에 서린 실망의 그림자가 그의 가슴을 들쑤셨음에도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으며 해리는 에그시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직접 만나면 바로 친해질 텐데! 잠깐 같이 티타임 가지는 것도 힘들어요?’
‘만나주기 싫으면 주례라도 서 주실 수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청을 담은 에그시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계속해서 울려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며칠째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건 따라붙은 환청을 이끌고 현재, 해리는 집으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묻었다. 오른손을 들어 피곤과 말할 수 없는 상념으로 무거워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손에 묻은 건조한 촉감이 유달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을 느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마른 세수를 반복한 뒤, 해리는 2층 발코니로 나가 하늘로 시선을 올렸다. 내일은 날씨가 좋을 것이라는 일기 예보가 있었다. 적어도 며칠 뒤까지는 야외 행사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해리는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행이라고, 몇 번이고 곱씹은 그 말을 뇌에 부러 새겨 넣었다. 그는 붉게 저물던 해가 사라지고 달이 제 자태를 빛낼 무렵에서야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에그시의 결혼식은 3일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