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린은 킹스맨 멤버 대부분의 신뢰를 얻은 남자였다. 사실 그들이 가끔 뒤치다꺼리를 부탁하기 편해지고자 그렇게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했지만, 멀린은 언제나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 동료들을 보조했다. 단순히 몸으로 뛰어서 하는 것만이 만사가 아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사전 조사를 하고, 더욱 수월하게 잠입할 수 있게 임무 내내 모니터링을 하고, 요원이 지령을 완료한 뒤 누구도
킹스맨의 자취를 쫓을 수 없도록 흔적을 지우는 것까지, 보다 광범위한 작업이 뒷받침되어야만 임무의 성공 여부가 갈렸다.
멀린은 자신의 칭호에 걸맞게 마법 같은 실력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간혹 현장의 열기에 드물게 도취된 동료에게 한 발 물러선
자리에서 이성적인 도움을 주는, 많은 경우에 필요한 남자였다. 공적인 일을 넘어 사적인 일에 가끔 끼어드는 것도 용납 받을 만큼
그랬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는 자신의 역할에 미약하게나마 잠시 회의가 들고는 했다. 그리고 그 원인은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그의 동료인 갤러해드, 어쩌면 친구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이인 해리 하트였다.
“처음엔 저도 이해했습니다. 그럴 만했으니까요.”
“이해받고 싶은 마음은 없네만.”
“입 다물라는 겁니까? 당신이 이러는 이유가 에그시 언윈 말고 따로 있다면, 조용히 하죠.”
멀린은 저에게 꽂히는 해리의 시선을 느꼈다. 무겁고 날이 세워진 갈색이 저를 노리고 있었다. 더는 파고들고자 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일 터였다. 멀린은 궁금했다. 저 남자는 지금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고 있기는 할까. 그가 남자의 이상 신호를 포착한 것은
에그시가 목소리를 잃고, 해리의 집으로 간 이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멀린은 걱정과 안도가 섞인 한숨을 내쉬었었다. 에그시가
불운한 일을 겪게 되어 언제 온전히 회복될지는 모르겠으나, 해리와 함께 있다 보면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년이 남자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둘을 잠깐 살펴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가끔 에그시를 만나고 오던 랜슬롯에게서 근황을 전해 들으며, 멀린은 제 예상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처럼 흔들리는 것은 갤러해드였다. 그는 에그시가 깨어난 뒤에도 과도한 폭력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튀는 핏방울과
고통 섞인 고함에 다시 매력이라도 느꼈는지 거침없었다. 그러기를 몇 달, 멀린이 인내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가 보기에
남자는 해리 하트와 갤러해드 사이, 공과 사를 분명히 하고 있지 않았다. 남자가 가진 칭호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자리였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간이 무게를 띄고 방 안을 채워갔다. 겨울이 다가오는 가을 같은 침묵이었다. 안경 속 해리의 눈이 감겼고, 곧 다시 떠졌다. 그림자가 진 눈가는 메말라 있었다.
“에그시는… 잘 자라 주었어. 유복하지 않아도 신념이 있고, 옳게 살고 싶어 하고 있는 데다 능력도 있지.”
“후보로서 훈련받기 전은 잘 모르지만, 저도 에그시가 그렇다는 건 압니다.”
“그 아이의 많은 장점이 목의 문제 하나로 가려지기엔 너무 아깝고.”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제가 물은 건 에그시가 다소의 문제를 가지고도 무사히 지내고 있고, 그걸 당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있는데도 왜 그렇게 흔들리냐는
겁니다. 당신은 갤러해드예요. 멀린의 질문에 해리는 어깨에 힘을 뺐다. 멀린 자네가 정곡을 찌르는 것에도 재능이 있는 줄 미처
몰랐는데. 핵심을 조사하는 백업만 몇 년을 해왔는데 그걸 못하겠습니까. 해리는 다시 답했다. 지친 어조였다.
“내 실수가 에그시의 부친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 하지만 에그시는 원망하지 않았어.”
“좋은 아이죠.”
“그리고 내가 추천한 후보가 되어 말을 잃었지.”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죄책감 때문이라면 괜한,”
아닐세. 해리는 멀린의 말을 끊었다. 그저 죄책감이었다면 17년 전 그날부터였겠지. 그 순간, 멀린은 직감했다. 해리 하트의
‘진짜’ 사적인 영역을 밟게 되었다고. 남자는 숨기고 싶었을 내심에 대해 자신을 청자(聽者)로 허락했다. 원해서 직접 추궁해
얻었음에도 멀린은 유쾌하지 않았다. 가볍지 않은 수락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
해리의 집에 짐을 놓은 처음 며칠 동안 에그시는 이것저것 새로운 규칙을 익히느라 바빴다. 해리는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줬지만 에그시는 적어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자고 마음먹었다. 혼자 살던 이에게 동거인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불편할
텐데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같이 살 사람이 딘 같은 놈이라면 얼마든지 최악의 룸메이트가 되어줄 자신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상대는 해리였다.
심적으로 납작 엎드려 상황을 살피는 동안, 에그시는 몇 가지를 알아냈다. 마지막 시험 전 해리와 함께 보낸 24시간만으로는 알기
어려울 만큼, 지극히 사소한 일상에 대한 것이었다. 눈치가 없는 편도 아니고 머리 굴러가는 것도 괜찮은 편에 속하는 청년은
그것들을 잘 기억해두기로 했다. 그러고 싶었다.
해리는 제법 규칙적으로 사는 남자였다. 밖에서 있을 때보다 조금 풀어졌으나 충분히 각이 잡힌 남자. 에그시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제
아비도 그랬을까 상상해보다 그만 두었다. 누구도 그를 닮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잘났다 못났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감각의
차이였다. 남자를 만났을 때부터 에그시가 인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해리 하트였고, 아직까지 그 인식은 변함이 없었다. 다
자라지 못한 아이의 고집이라고 해도 좋을 법한 불변이었다.
어찌 보면 고정 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인식이 에그시의 머리에 자리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해리의 성격이 결코 좋다고는 하기
힘들다는 것은 진작 알았다. 딘 패거리들의 도발에 냉큼 싸움판을 벌이더니 전부 쓰러뜨리는 걸 직접 보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함께
지내게 된 뒤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 해리의 태도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에그시는 곱씹었다. 해리 하트는 에그시 언윈에게 지나치게
관대했다. 동거 이전의 해리가 한 발 늦게 그의 배려를 알 수 있도록 안배했다면 지금의 그는 미리 눈에 보일 정도로 많은 것을
고려해주었다. 목소리를 잃었다는 하나의 문제가 해리에게 그렇게나 크게 다가올 줄 알았더라면, 에그시는 그의 제안을 조금 더
고려해보았으리라.
에그시는 해리에게 있어 배려해야 할 대상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해리를 존경하고 애정하지만, 책임져야 할 짐짝이 되기 위해 남자의
내민 손을 잡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다. 에그시는 지금의 감각이 이전에 경험했던 것임을 알았다.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고
지긋지긋하게 싫어한 양부에게서 쥐꼬리나마 의존하면서, 청년의 체념은 고통을 동반했다. 익숙해져도 마음 깊숙한 곳을 찌르는 무언가.
에그시는 결코 해리와 있는 시간에 그런 것을 품고 싶지 않았다. 반복하자면, 남자는 청년에게 있어 인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에그시는 두어 달이 지난 뒤, 해리에게 지금 자신의 상황에서 어떤 직업을 구할 수 있을지를 물었다. 언제 나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지금, 재활 치료비마저 해리에게 신세 지고 있으니 하루라도 빨리 갚고 싶다고 했다. 에그시는 이것이
옳다고 여겼으나, 해리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자는 메모지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에그시, 부담 가지지 마라. 이럴 필요가 없어.
그렇게 말하는 해리에게서 에그시는 견고한 불허(不許)를 읽었다. 그 뒤로 이어진 저녁과 밤, 굿나잇 인사를 나눌 때까지
해리는 에그시의 메모라는 존재 자체를 모르는 척 굴었다. 그것은 그 다음 날도, 다음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에그시는 당황했고,
예상치 못한 상대의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이상하다는 것을 알았으나 어디서 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에그시는 결국, 해리에게 자신이 이전과 다름없이 멀쩡하다는 것을 보여주자고 마음먹었다. 그것은 돌아서 가는 길이었고, 갈등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해리는 다행히도, 에그시가 그의 생활의 자잘한 일들을 돕는 것은 기꺼이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