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노을이 다가왔던 그 날에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을 내린 미도리야는 결정을 행동으로 옮겼다. 그새 또 무슨 일이 있구나 싶은 얼굴의 우라라카와 이이다의 협조를 받아 혹시라도 상대가 먼저 저를 부를까 봐 신경 써서 동선을 바꾸고, 단체로 움직일 일이 있어도 되도록 거리를 벌리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한 결과는 그럭저럭 성과가 있는 것 같았다. 일단 전혀 부르지 않으니 호칭을 지적당할 일이 없긴 했으니까.
하지만 과연 바쿠고가 이런 미도리야의 거리 두기를 용납했다고 묻는다면, 글쎄다. 점차 사나워지는 상대의 시선이 금방이라도 미도리야를 죽일 것처럼 따라붙자 반 아이들이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한동안 너네 괜찮아 보였는데 또 왜 저러냐. 기억이 없어진 나머지 실수라도 한 거야? 저 녀석 엄청나게 쪼잔하니까, 별로 잘못한 게 없어도 그냥 대충이라도 사과해버려. 미도리야는 사정 모르는 조언에 어색하게 웃었다. 고개를 주억거리며 속으로 생각했다.
‘평소에 얼마나 인망이 없었길래. 물론 그래 보이긴 했지만…’
그런 일방적인 응시와 회피라는, 개인과 개인의 미묘한 줄다리기와는 별개로 그들이 사는 도시는 점차 흉흉한 비극으로 휘감기기 시작했다. 며칠에 한 번씩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소식과 실종자 가족의 통곡이 TV에 등장했다. 사람을 찾는다는 전단이 전봇대와 골목마다 붙여졌다. 나이와 성별, 개성을 망라한 실종자들에게서 겹치는 특징은 없어 보이는 데다 도시라는 특성상 실종은 단순 가출이나 여행으로 치부하기 쉬웠다. 그러나 짧고 일정한 사건의 주기, 그리고 단 하나의 공통점으로 인해 경찰에서는 결국 연쇄 실종 사건으로 분류해 수사 인력을 늘리겠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했다.
굳건한 수사 의지를 밝히던 기자 회견이 무색하게도 성과는 지지부진했고, 돌아오지 않는 이들로 인해 사람들의 불안이 고조되면서 각 기관과 학교에서도 각자 나름의 대응 메뉴얼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물론 유에이 고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안내지와 함께 담임의 무심하고 신랄한 주의가 반 모두에게 뿌려졌다.
“되도록 혼자서 다니지 마라. 분위기 안 좋다는 정도는 다들 알고 있겠지?”
“네에―”
말끝을 늘리는 몇을 지적한 아이자와 선생은 교탁을 가볍게 치고는 이만 집에 가도록 허락했다. 미도리야는 가방을 챙겨 우라라카와 이이다와 함께 움직였다. 웅성웅성, 흥미 또는 두려움으로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옮기거나 무능한 어른들을 욕하는 어린 목소리들이 하굣길의 배경으로 깔렸다.
“어제 엄마한테 전화 왔었어. 유에이에선 아무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괜찮다고 했는데도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더라고.”
“목격자가 전혀 없어서 수사가 힘들다던데. 형도 혹시 관련된 뭐라도 발견하면 부탁한다고 공문을 받았다더군.”
“잉게니움은 사이드킥도 많으니까 확실히 도움이 되겠네. 연쇄 실종의 공통점이 목격자가 전혀 없다는 건 좀 이상하지만 말이지. 그렇다면 아마 범인이 은신 계열이거나 준비를 철저히 했을 확률이 높을 거고, 그게 아니라면 또 어떤 개성을 고려해야…”
“오타쿠 모드 그만해, 미도리야!”
혹시라도 이미 늦은 것일지 모른다는 잿빛 의혹이 길거리에 안개처럼 만연했다.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사건의 범인이 대체 누구일지를 추측하면서도 셋은 과연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그저 부디 무사히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을 뿐, 암묵적인 합의가 공기 중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숨을 쉴 때마다 몸 안으로 들어오는 무형의 마이너스를 느끼며 미도리야는 자신의 옆에 자리한 친구들에게 감사했다. 우정이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친근함은 조금 부족했지만, 그간 쌓인 고마움과 안정감이 있었다.
아, 잠깐.
슬쩍 미소를 그리던 미도리야의 걸음이 돌연 느려졌다. 한순간 머리에 스쳐 지나간 하나가 발에 매달려서는 땅 깊숙한 아래로 잡아끄는 것만 같았다. 앞서 두어 걸음 나아가던 우라라카와 이이다가 미도리야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미도리야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원래 걷던 속도로 되돌리면서 애써 머릿속에서 지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것은 집에 돌아와 저녁 밥상 앞에 앉았을 때도, 따뜻한 물을 가득 담은 욕조에 몸을 담갔을 때도, 이만 자라는 부모님에게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할 때도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뿐만 아니라 과거의 자신이었어도 이런 걱정 섞인 의문을 품을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음에도 그랬다.
‘바쿠고, 군은… 누구랑 같이 다니는 것 같지 않았는데. 위험하지 않을까?’
*
그 이후 미도리야는 그저 상대를 피하기만 하면 되었던 그간의 행동에 까다로운 하나를 더 추가했다. 바쿠고가 저를 노려보고 있지 않을 때 그를 관찰한다는, 어쩌면 입학시험의 편차치 79보다 더 어려운 미션이었다. 그러나 미도리야가 누구인가. 난관을 넘고 넘어 기어이 유에이 고교의 히어로반에 일원으로 자리한 소년은 해내고야 말았다. 어쩌면 사라진 기억 너머의 옛 모습이 신체에 흔적으로 남아 가능했을지도 몰랐다.
“역시 혼자 가는 게 분명해.”
“미도리야?”
“어, 응?”
팔꿈치를 책상에 대고, 반쯤 쥔 주먹을 입에 붙인 미도리야는 작게 중얼거렸다. 속으로만 생각했다고 여겼으나 저도 모르게 밖으로 튀어나왔던 모양인지, 쉬는 시간이 되어 미도리야에게 다가오던 우라라카가 의문형으로 그를 불렀다. 미도리야는 다급히 손을 입에서 떼었다. 왜 그러냐고 되묻는 그에게 우라라카가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두 손을 모으고 살짝 고개를 숙인 그녀가 미안하다는 사과를 먼저 건네왔다. 오늘 같이 못 갈 것 같아. 여자애들이랑 방과 후에 쇼핑을 가기로 해버렸어!
“아, 그럼 이이다랑…”
“이이다도 오늘 가족 관련해서 따로 먼저 가야겠대. 방금 나한테 말하고 나갔어.”
“그랬구나. 알았어. 그럼 잘,”
“그래서 말인데!”
수긍하는 말에 이어 잘 다녀오라 하려던 미도리야에게, 우라라카가 선수를 쳤다.
“이런 추측은 하기 싫지만, 네가 기억을 잃은 그 날에도 어쩌다 보니 각자 일이 생겨서… 미도리야 너만 혼자 집에 가버렸거든.”
그랬더니 기억이 없어졌다고 해서, 굉장히 놀랐었어. 미도리야는 우라라카의 얼굴에 자리한 죄책감을 알아차렸다. 그녀나 이이다 중 한 명이라도 평소대로 함께 갔다면 그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 여기는 듯했다. 미도리야는 벌떡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나 손사래를 쳤다. 아마 운 나쁜 사고였을 거고, 그 뒤로 아무 문제가 없지 않으냐고 열심히 말했다. 우라라카는 그런 미도리야를 빤히 쳐다보다가 어딘지 대견히 여기는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한 손의 검지를 척 들어올린 그녀는 미도리야의 코앞에 그것을 대고 좌우로 까딱였다.
“그래도 걱정되니까, 오늘 꼭 다른 애들이랑 같이 가.”
“으응, 그렇게 할게.”
떨떠름하게 그러마 답한 미도리야에게 가볍게 박수를 짝 치고는 믿겠노라 한 우라라카가 먼저 몸을 돌렸다. 쭉쭉 걸어나가 교실 저 멀리서 그녀를 기다리던 여자애들에게 합류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미도리야는 곤란해하며 자리에 다시 앉았다.
‘어쩌지? 가는 길이 비슷한 애들이 딱히… 없는데…’
애도 아니고 클래스메이트더러 집 근처까지 데려달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미도리야는 앓는 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엎어졌다. 우라라카가 기껏 걱정해줬는데 무시할 수도 없고. 안타깝게도 미도리야의 성실한 뇌는 주인이 기꺼워하지 않을, 거의 유일한 방안을 도출해냈다. 사실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딱 한 명 있기는 하지. 반도 같고, 집이 같은 동네다 못해 옆집인 사람이니까. 하지만 어떻게 부탁할 수 있겠어.
‘지금껏 열심히 피해왔다고! 저쪽도 다 알 만큼!’
미도리야가 속으로 울부짖는 것과 상관없이 시간은 공평하게 흘렀다. 반장의 경례 소리와 함께 오늘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미도리야는 먼저 교실 문을 나서는 우라라카에게 힘없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천장과 바닥을 번갈아 보다 침을 꿀꺽 삼킨 그는 힘겹게 일어나 다가갔다. 하필이면 가장 나은 선택지가 된, 바쿠고 카츠키에게로.
그가 대여섯 걸음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었을 무렵, 바쿠고는 막 키리시마와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일 보자며 힘차게 말을 건 키리시마에게 귀찮다는 듯이 대꾸하고 있을 때였다. 저에게 다가오는 상대를 알아차린 바쿠고가 빠르게 고개를 이쪽으로 향했다.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번뜩이는 눈빛을 보았다. 이전처럼 한순간에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었다. 보다 위험한 종류의,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것처럼 위협적이었다.
미도리야는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상황에 놓인 사냥감의 심정을 이해했다. 심장이 점차 달음박질을 해대고 긴장으로 손이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불쾌하고 멈추고 싶은 기분이 찌릿찌릿 손끝 발끝부터 올라왔다. 몇 번 입을 벙긋대던 미도리야는 결국 견디지 못했다. 드물게 무슨 용건인지 들어보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바쿠고에게서, 도망쳐버리고야 말았다.
“뭐야? 미도리야? 어이, 바쿠고 너 지금―!”
“망할 데쿠가!!!”
막 집에 가려던 차에 미도리야가 바쿠고에게 다가왔다는 희귀한 상황을 마주해 자리를 지키던 키리시마가 달아나버린 미도리야를 당혹스러운 어조로 불렀다. 한껏 다리를 뻗어 달리던 미도리야의 귓가에 뒤에서 뭐라 힘껏 내지르는 바쿠고의 고함과 그보다 훨씬 큰 폭발음이 울렸다. 바쿠고와 남겨진 키리시마를 염려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던 미도리야는 눈을 질끈 감은 채 학교 정문 근처에 도달할 때까지, 안전거리를 확보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