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사귀게 된, 결코 관대하거나 느긋한 성격이 아닌 소꿉친구에게 필히 숨겨야 했던 것이 들켜버릴 바에야 벼락 좀 맞는 게 낫지. 감히 바로 대답하지 못한 미도리야 이즈쿠는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도 창백하게 혈색이 없을 얼굴에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뿐이랴, 짧은 순간에 흐르는 식은땀으로 인해 축축하게 등이 젖었음이 느껴졌다.
“호오, 입 다물고 있으시겠다? 자신 있다 이거지?”
가소롭다는 뜻이 명백한, 바쿠고의 웃음은 드러난 날카로운 송곳니와 함께 미도리야에게 후환을 예고했다. 이미 열어서 내용을 확인한 뒤 물어본 것이리라. 안 그래도 요즘 심기가 불편하던데. 제멋대로 딱 붙은 입술을 억지로 떼어 입을 열었다. 긴장한 탓인지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캇, 큼, 캇짱. 이건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주머니께서 받아가라고 하시길래…”
“그 전에 네가 갖고 싶다고 티를 냈겠지.”
“…그렇습니다.”
미안. 냉큼 무릎을 꿇고 정좌한 미도리야가 고개를 숙였다. 바쿠고에게 들킨 것은 그간 자신이 몰래 모아 온 사진집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일 무렵부터 거의 지금의 모습에 가까워질 때까지의 바쿠고가 찍힌 사진으로 가득한. 팬들이 봤다면 얼마를 부르건 반드시 손에 넣었을 귀한 것이었지만, 바쿠고는 실제가 있는데 뭐하러 이딴 걸 가지냐며 타박했다.
“사진 따위를 받아 보고 있을 시간이 있으면, 날 만났어야지.”
석고대죄할 기세의 미도리야에게 던지는 바쿠고의 말은 싸늘했다. 역시 화났구나. 미도리야는 다시 사과하려던 입을 딱 다물었다. 연인 사이에 사진 좀 가지고 있으면 어떠냐도 싶겠지만, 이번만큼은 미도리야 스스로 잘못했다 느끼고 있었다. 서로의 일이 바빠 한 달 넘게 보지 못했던 연인의 집에 와서, 만나지도 않고 냉큼 사진만 받아간 건 너무한 게 맞았으니까.
복장으로 정체를 숨긴다 해도 엔터테이먼트적 요소가 강한 현대의 히어로에게 사생활 노출은 각오하고 있어야 하는 것 중 하나였다. 게다가 사적인 스캔들 중 제일로 치는 연애는 한창 인지도와 인기를 쌓아야 할 시기에는 부정적인 영향이 컸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결국 둘이 나빴던 사이를 좁히고 마음을 통할 즈음에는 공개 연애를 하기엔 여의치 않은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바쿠고 카츠키가, 남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다는 폭살왕이 그런 것도 신경 쓰는 사람이었나 묻는다면, 물론 아니었다. 애정표현은 서로의 집에서. 밖에서는 만날 수 있으나 스킨십 금지. 이 정도의 규칙도 남이 무슨 상관이냐는 바쿠고에게 미도리야가 드물게 강력히 주장해 얻어낸 쾌거였다. 사무소 사람들에게 폐를 끼칠 수 없다고 매달려 빌 기세의 미도리야를 보던 바쿠고가 알겠다는 한숨과 함께, 그날 밤 연인을 집에 돌려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덤이었다.
그날 이지메와는 다른 방향으로 엄청 괴롭혔으니까 순순히 따라줬건만. 정신 없이 일하는 와중에도 틈틈히 미도리야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어디를 다녀오고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봤던 자신을 떠올린 바쿠고의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나만 좋아하는 거냐고. 한쪽만 무거운 애정으로 이루어진 관계일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덜컥 솟아올랐다. 그의 얼굴이 사납게 구겨졌다.
그 순간이었다.
“정말 미안해. 내 잘못이야. 하지만…”
“하지만 뭐.”
“캇짱을 실제로 만나고 나면, 일에 집중이 안 된단 말이야. 히어로 업무일 때는 괜찮지만, 인터뷰라던가 촬영이라던가. 자꾸 생각나니까.”
하지만 아예 못 보는 건 또 싫고. 그래서 몰래 네 어머니께 사진을 부탁했던 거라고 말하는 미도리야의 얼굴은 건드리지 않아도 터질 듯 달아올랐다. 울보인 건 아직도 고치지 못했는지 벌써 눈가가 촉촉한 그 모습을 보며, 바쿠고는 입맛을 다셨다. 솔직하게 부끄러워하는 연인으로 인해 충족된 만족이 독점욕을 달랜다. 그러면서도 조금 짜증이 나기도 하는 복잡한 기분이 몸 안을 가득 채웠다.
하긴 늘 이랬지. 눈앞의 존재를 마주할 때면 언제나 단순하지 않아 곤란했고, 결국 답답하고 화가 나고야 말았다. 바쿠고는 더는 참지 않고 열이 올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미도리야를 잡아당겨 입술을 겹쳤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담아 한껏 탐하고 입을 떼자 참았던 숨을 겨우 내쉬는 서툰 미도리야의 꼴이 우습고, 또 사랑스러웠다.
“남의 사진을 본인 모르게 몰래 모으다니, 스토커가 따로 없잖아.”
“미안, 잘못했어.”
“미안하면 버릴 수 있냐?”
“그건, 좀… 너무해.”
“가져.”
응? 아깝고 서러웠는지 아슬아슬하게 고여 있던 눈물이 미도리야의 볼 위로 한 줄기 내려온 것과 함께, 바쿠고는 혀를 내밀어 그것을 핥아 마셨다. 체온보다 조금 더 뜨거운 짠맛. 당황해 가까워진 거리를 벗어나려는 미도리야를 단단히 붙잡은 바쿠고가 최후통첩을 날렸다. 불안하거나 걱정하는 짓이라곤 하나도 모를 듯한 오만한 폭군의 자세 그대로였다.
“공짜는 없다. 키스 한 번에 사진 한 장으로 딜, 콜?”
“쪼잔해.”
“시끄러. 윈윈이잖아.”
이후 미도리야가 가진 바쿠고의 사진 개수를 모를 이들을 위한 여담으로, 폭살왕과 데쿠가 있는 각각의 히어로 사무소에 둘의 며칠 분의 휴가가 신청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