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잔혹하다. 가장 아래에 숨어 모든 절망과 재앙이 휩쓰는 꼴을 보고 나서야 슬그머니 기어 나와 포기하지 말라 속삭이는 그것에 분노해보지 않은 자 있던가. 미도리야 이즈쿠는 동의했다. 그 또한 화가 없지만은 않았다. 다만 매달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간절했을 뿐이었다. 몇억, 몇십 억분의 일의 확률로 자신의 꿈을 이룰 기회를 부여받은 운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더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다 놓아야 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쇠사슬처럼 무거운 미련을 질질 끌며, 흉한 질투가 흐르는 가슴을 부여잡아야 했겠지.
“그래서야.”
“이, 멍청한 등신아!”
눈앞의 남자는 잔뜩 인상을 구긴 채 위협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와락 미도리야의 멱살을 잡아 코앞까지 끌어당겼다. 그 상태로 마구 흔들지 않는 것만이 최소한의 정신을 붙들고 있다는 증거였다. 남자는 잡아먹을 듯이 윽박질렀다.
“뒤질 게 뻔한 곳에 쪼르르 가는 게 히어로냐고!”
무슨 수를 쓰건 최후까지 이길 방법을 찾으라던 건 네가 아니었냐며, 바쿠고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미도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랬었지. 캇짱이 승리를 포기하는 건 도저히 못 봐주니까. 거기까지 말한 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바쿠고와 눈을 맞췄다. 입이 열렸다.
“하지만 난 안 돼.”
“왜!”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단 한 명이라도 기다리고 있다면, 나는 가야만 해. 미도리야의 단호한 눈을 본 바쿠고는 뿌득 이를 갈았다. 흉악한 기세와는 달리 자신을 잡은 바쿠고의 손이 떨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미도리야는 달래듯 제 손을 그 위에 얹었다.
“미안해.”
“잡소리 지껄이지 마.”
“미안해 캇짱.”
“사과할 짓을 하지 말라고!”
우리는 목표로 한 히어로의 이상理想이 달랐다. 지향이 다르니 도착점도 갈릴 수밖에 없는 것을. 미도리야는 짧게 웃으려다 말았다. 히어로라면 두려움을 감추고 웃으라는 배움을 바쿠고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리라. 자신에게는 너무나 감동적인 그 말이, 강하고 재능 넘치는 소꿉친구에게 있어서는 그저 겁쟁이의 수단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미도리야도 알았다. 지금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은 십중팔구 저승행이었다. 살아남을 확률은 제로라 단언해도 좋을 법했다.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을 선택을 그라고 하고 싶었던 게 아니다. 삶이 소중했고, 보다 많이 배우고 익혀 동경하던 사람처럼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도망친다면 제 속의 심지를 지킬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올마이트가 인정해준 처음 자신의 마음을 지우는 게 되어버리니까. 그런 신념을 바쿠고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 미도리야는 그저 바쿠고에게 이런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가지 말라고, 병신 새끼…”
절로 흐려지는 말끝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 듯, 바쿠고는 핏발이 선 눈에 다시금 힘을 주었다. 머저리가 제멋대로 사지로 들어가려는 걸 막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서로를 온 마음으로 미워하던 것만이 아니라는 걸 깨닫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화가 나지는 않았으리라. 상대 역시 저와 마찬가지일 거면서, 다 알면서 그러는 꼴이 더욱 분노에 불을 질렀다. 약점을 파고들 틈도 없다는 직감이 머릿속에서 경보음을 울려댔다. 무엇을 사용해서도 이길 수 없을 거라는 느낌에 그는 필사적이었다. 나도 가겠어. 끝내 바쿠고가 합리적으로 행동하라 외치는 자신의 이성을 억지로라도 억누르려던 그때였다. 미도리야가 웃었다.
“기다려줄래?”
두려움을 참으며 짓는 그 미소에 바쿠고는 뒤늦게 귀에 들려온 말을 알아들었다. 미도리야는 반복했다. 돌아와야 할 이유 중에 캇짱이 기다려준다는 게 있다면, 나 정말 힘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바쿠고는 멱살을 잡은 손을 놓고 미도리야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놀라 굳었던 미도리야는 그를 마주 안았다.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진득하니 눌러붙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바쿠고는 천천히 팔에 힘을 뺐다. 여전히 가까운 거리 사이로, 뜨거운 수증기와 같은 둘의 숨이 오갔다.
“돌아오면, 죽지 않을 만큼만 패줄 거다.”
“아프겠네. 좀 무서운데 그거…”
“데쿠 주제에 감수해야지.”
가버려. 바쿠고는 뒤돌아섰다. 미도리야는 펄펄 끓는 쇳물이 굳은 듯한 단단한 등에 시선을 주었다. 꼭 돌아올게. 먼저 걸어가 버리는 바쿠고에게 다짐한 미도리야 역시 발걸음을 옮겼다. 제게서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듣던 바쿠고가, 더는 들려오지 않자 멈추어 섰다. 같이 죽자고는 도저히 못 하는 놈. 그러니 기다리라고만 하고 내뺀 거겠지. 바쿠고는 졌다는 기분에 울컥대는 속을 달래기 바빴다.
바쿠고는 그 말이 저에게 족쇄를 채웠음을 모르지 않았다. 데쿠가 돌아올 때까지, 그 사슬이 목을 조르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