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일정을 모두 마치고 현관 신발장에 들어선 미도리야는 늘 하던 대로 거실 소파에 시선을 주었다. 보통 때라면 그곳에 앉아 있을 바쿠고의 모습이 없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씻는 걸까? 이런저런 이유를 가볍게 추측해보며 제 방으로 간 미도리야는 깜짝 놀라버렸다. 엔간해서는 미도리야의 방에 오지 않던 바쿠고가 떡하니 침대에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왔냐.”
“다녀왔어. 캇쨩, 내 방에는 웬일이야?”
용건이라도 있는 거냐고, 평소라면 나를 네 방에 데려가지 않느냐 물어오는 미도리야에게 바쿠고는 이리 오라 손짓했다. 미도리야는 순순히 다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많은 사건과 오해를 거쳐 연인이 된 둘은 유에이 고교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사귀어온 어엿한 연인 사이였다. 바쿠고도 조금이나마 성질을 죽일 줄 알게 되고, 미도리야가 그와 가까이 있어도 예전만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만 봐도 그간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리라.
같은 맥락에서 바쿠고 한정으로 눈치가 조금 더 는 미도리야는 약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연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바쿠고는 잠시 입을 다물고 빤히 어딘가로 눈길을 주었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방바닥 멀리에 엉망으로 구겨져 나동그라진 잡지가 보였다. 표지에는 미도리야의 히어로 차림과 데쿠 특집이라는 홍보 문구가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데쿠 네놈, 이 잡지 인터뷰에서 결혼 얘기 나왔지.”
“본 거야? 벌써 나오다니 빠르네.”
인터뷰어가 집요하게 그 주제만 물어봐서 답하기 힘들었다 회상하는 미도리야에게 바쿠고가 으르렁거렸다. 미도리야는 열심히 그를 달래려 애를 썼다. 우리 사이는 비밀이고, 결혼 적령기니까 그런 질문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거라고 이해시키려는 미도리야를 보는 바쿠고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양팔을 교차해 팔짱을 낀 자세를 취한 바쿠고가 물었다. 너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 하냐?
“으음. 아직 가정을 꾸릴 만한 준비도 안 되어 있다고 했던가. 말하진 못했지만, 무엇보다 나한테는 캇쨩이 있으니까 무리고.”
“흐—음.”
“저기, 역시 마음에 안 드는 거야…?”
“이 몸이 유일한 이유가 되어야지. 쓸데없는 거 덧붙이지 말라고.”
“하지만 캇쨩 얘기를 인터뷰에서 할 수는 없잖아.”
바쿠고는 오른손을 뻗어 미도리야의 왼쪽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당황한 상대의 몸이 균형을 잃고 끌려가는 쪽으로 기울어지자 바쿠고는 자유로운 다른 손으로 미도리야의 허리를 잡았다. 얼굴이 맞닿을 것 같은, 마치 바쿠고에게 갇혀버린 듯한 느낌에 미도리야는 굳어버렸다. 숨소리마저 제대로 내지 못하고 불안하게 눈만 굴리는 그 모습에 습관적인 짜증과, 그보다 조금 더 큰 애정이 치고 올라와 바쿠고는 사납게 웃었다.
“저기 캇쨩. 이것 좀 놓고 얘기하면,”
“야.”
유에이 고교 시절부터 어엿한 히어로가 된 지금까지 미도리야가 신체적인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음을 알았다. 뿌리치고 싶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을 거면서도 어색하게 웃으며 그저 놓아달라고만 한다. 이런 모습은 자신 앞에서만 보여주는 연인다운 무름일까. 절대 아니겠지. 바쿠고는 미도리야가 다른 곳에서도 이럴까 생각해보고는 제멋대로 열 받았다. 백 퍼센트의 확률로 히어로가 아닌 평범한 직업, 회사원 등이 되었어도 회식 자리에서 주어지는 대로 술잔을 받다 뻗을 타입이 바로 미도리야 이즈쿠였다.
그런 한심한 녀석이라도 놓지 않겠다. 놓을 수 없다.
어디에도 빼앗기지 않아. 다 눈 돌려.
험악하게 웃는 얼굴 그대로 바쿠고는 미도리야의 허리를 잡고 있는 손을 풀었다. 아직 손목이 잡힌 미도리야는 그것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저 놓아달라고, 붙잡힌 곳이 저릴 것 같다고 말하려던 찰나에 미도리야는 바쿠고가 무언가를 꺼내 먹는 듯한 움직임을 보았다. 우물거리며 입안에 정체 모를 것을 굴려보는 바쿠고에게 질문하려던 미도리야는 곧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끽해야 말이 되다 만 신음 정도나 낼 수 있게 되었달까.
바쿠고가 붙잡은 미도리야의 왼손 약지를 제 입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순간 손가락을 먹어버리려는 줄 알고 하지 말라 소리칠 뻔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넣어진 손가락으로 느껴지는 바쿠고의 뜨거운 혀와, 그보다 차갑고 딱딱한 금속의 감촉 때문이었다. 꼼짝도 하지 못한 채 미도리야는 몸을 떨었다. 마치 영겁과도 같은 짧은 시간이 흘렀다. 바쿠고는 만족한 눈으로 천천히 미도리야를 놓아주었다.
“어, 저기, 이건…”
“짜증 나게 하지 말라고. 쓰레기 퇴치용이다.”
애인이 있다는 소문 정도는 도는 거 아니까, 그걸로 확인 사살해 버리라고. 바쿠고는 그리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머리를 긁고는 혼자 먼저 방 밖으로 나가버리는 그와 제 손을 번갈아 보던 미도리야는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얼굴과 제멋대로 고장 난 눈물샘을 수습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과장해서 좋아하는 사람의 공격이 너무 강해, 행복해 죽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아, 그럼 캇쨩 반지는?’
시간이 지나 정신을 조금이나마 차렸을 때 미도리야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은 그것이었다. 아까의 기억을 돌이켜 봐도 바쿠고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지 않은가. 미도리야는 서둘러 외출할 준비를 했다. 겨울이 다가오는 날씨는 쌀쌀하다 못해 추울 테지만 지금의 자신은 추위 같은 것, 조금도 느끼지 못할 터였다.
“나보다 캇쨩이 더 인기 많으니까! 캇쨩도 분명 필요할 거라고!”
그런 혼잣말을 하며 바쿠고에게 줄 반지를 사러 나가는 미도리야의 머리 위로 아직 아슬아슬하게 지지 않은 햇빛이 내려 반짝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