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 잔인하리만치 강하게 내리쬐는 낮이었다. 이마의 땀을 훔친 만큼 목이 말랐다. 연신 손으로 부채질하다 길거리에 널린 카페 중 아무거나 골라 들어가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테이크아웃이요, 쿠폰은 필요 없어요. 안녕히 가시라는 의례적인 인사를 받으며 급히 빨대를 이로 물고 음료를 빨았다. 차갑고 새콤달콤한 맛이 입과 식도를 식히자 한결 살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디랬지…?’
매고 있던 백팩에서 지도를 꺼내 몇 번이고 살폈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낯선 지역의 처음 와보는 도시에서 미도리야는 당연히도 헤맸다. 그놈의 대학 과제가 뭐라고. 잘 풀리지 않아 끙끙대던 중,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던 조모의 고향에 쓸 만한 거리가 있다는 말에 덥석 여기까지 온 게 문제였다. 생각보다 개발과 발전이 많이 진행된 모양인지 모친이 풀던 옛 도시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은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애초에 지금까지 찾던 게 남아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미도리야는 금세 다 마셔버린 레모네이드가 아쉬워 반쯤 녹은 얼음만 든 컵을 살짝 흔들었다. 더위 먹어 쓰러지지 않게 방어도 잘했겠다, 여기까지 와서 끝까지 노력도 해보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낯선 장소에서 제일 좋은 방법은 이곳을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일 터였다. 미도리야는 바삐 눈을 움직이며 길거리를 지나치는 이들을 물색했다. 도시 토박이로 보이고, 말을 걸기 쉬워 보이는 사람이면 좋을 텐데. 그러니까…
“실례합니다. 뭐 하나 여쭈어도 될까요?”
“어머. 학생?”
“네. 과제 때문에 여기 왔는데요. 초행이라 잘 몰라서요.”
운이 좋았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를 잡은 미도리야는 기세를 몰아 원하던 정보를 얻는 데 성공했다. 새치라고 퉁치기엔 조금 힘든 수준의 흰 머리가 햇빛에 반짝이는 아주머니는 대대로 이곳에 뿌리를 박고 살아왔다며, 미도리야가 원하는 것의 위치에다 소소한 전승도 몇 가지 덧붙여 얘기해주었다. 미도리야는 급히 수첩과 펜을 꺼내 받아 적은 뒤 머리와 허리를 꾸벅 숙여 연신 감사를 전했다. 무사히 과제 끝내고 돌아가라는 아주머니의 덕담으로 대화를 끝내고, 그녀가 알려준 방향으로 옮기는 발걸음이 언제 지쳤었냐는 듯이 가벼웠다.
*
“찾았다!”
마침내 미도리야는 뿌듯하게 웃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제법 헉 소리가 나올 법한 숫자의 계단이 주르르 늘어서 있었다. 저걸 다 올라오다니, 내 체력도 무시할 수준은 아닌가 봐. 당장 내일이면 근육통으로 고생할 게 뻔한 다리를 수고했다고 툭툭 두드린 미도리야가 다시 정면을 보았다. 평평하게 돌을 다듬은, 조금 떨어진 길을 따라가면 앞에 작은 사당이 보였다. 내내 찾고 있던 게 맞았다. 미도리야는 메모했던 수첩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엄청나게 예전, 이 도시가 아직 작은 마을들의 집합에 불과했던 시절에 이 사당이 지어졌다고 했다. 엮인 설화는 그 당시 흔하던 요괴 퇴치였다던가. 미도리야는 헤실 거리며 다가갔다. 사진 좀 찍고, 향토 도서관을 찾아 관련 자료를 뒤지면 리포트용으로는 충분할 터였다.
이윽고 찰칵, 카메라 특유의 소리가 났다. 미도리야는 디지털카메라의 버튼을 조작해 찍힌 사진을 확인했다. 과제용 사진을 핸드폰으로 하긴 좀 그래서 기껏 챙겨왔는데, 써볼 일이 생기니 가져오길 잘했다 싶었다. 두어 번 더 사당의 전체적인 모습을 렌즈에 담은 미도리야는 안의 내용물을 크게 찍으려 가까이 다가갔다. 몸을 앞으로 슬쩍 숙인 그때, 무언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 아니, 글씨?”
사당 안에 자리한 것은 별것 아니었다. 금줄로 칭칭 휘감긴, 묘하게 생긴 돌 하나가 다였다. 미도리야가 신기해한 것은 금줄 위에 척하고 붙여진 종이였다. 정교하고 복잡하게 그려진, 혹은 쓰인 것으로 보아 아마 부적이 아닐까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문득 미도리야는 궁금해졌다. 여태 공부해온 전공이 부적의 내용을 밝히는 데 혹시 도움이 될 수 있으려나. 조금 소심한 평소 성격이 무색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옛 속담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으앗?!”
미도리야가 문양에 가까워 보이는 글씨를 좀 더 자세히 보고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치렁치렁 늘어진 금줄을 건드린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정전기처럼 따끔한 감각이 닿았던 손가락에서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깜짝 놀란 미도리야가 손을 치우고 뒤로 물러났다. 잘못 손댄 것인가 싶어 이리저리 살폈으나 아무것도 떨어지거나 망가진 게 없었다. 다행이라는 안도가 한숨으로 나왔다. 미도리야는 아직도 저릿한 잔상이 남은 손을 쥐었다 폈다. 괜히 찜찜해져 괜한 짓을 했다 자책한 그는 서둘러 돌아가기로 했다. 카메라를 백팩에 넣고 손을 모아 사당에 기도한 뒤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자신을 목표로 쇄도한 습격에 미도리야는 본능적으로 급히 몸을 틀었다. 그가 본래 걸어가던 궤도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번쩍거리는 불꽃과 단단한 돌바닥이 부서지는 요란한 폭음이 측면에서 벌어졌다. 갑작스런 공격을 피하느라 균형을 잡지 못한 미도리야는 비틀거리다 넘어졌다. 콜록거리며 쓰라린 엉덩이를 문지르던 찰나에 그는 저에게로 다가오는 타인을 한발 늦게 알아차렸다. 누구지?
돌가루와 먼지가 섞여 매캐하게 오염된 시야로 검기만 하던 인영이 점차 제 모습을 드러냈다. 미도리야는 입을 떡 벌렸다. 우습게도 제일 처음 인지한 것은 상대가 잘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제 자리에 균형 있게 잡힌 이목구비와 높은 콧대, 모양 좋은 입술은 미남의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했으나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난폭한 기세가 사납기 그지없었다. 날이 선 검보다는 뾰족한 가시가 잔뜩 박힌 철퇴와 같은 느낌이랄까. 결코 다가가고 싶은 유형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단순히 그의 미모가 아니었다. 머리 위로 쫑긋 세운 세모꼴의 동물 귀와 언뜻 보이는 꼬리까지,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그것들에 미도리야의 머릿속 상식이 바위에 부딪힌 달걀처럼 파삭 깨져버렸다. 당황으로 어찌할 줄을 몰라 하던 사이에 바짝 다가온 정체불명의 미남이 흉악하게 웃었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였다.
“이게 얼마만이야—? 빌어먹을 새끼가.”
전혀 우호적인 의미가 아니라고 대놓고 티 내는 인사말과 함께, 미도리야는 그대로 멱살이 잡혀 위로 달랑 끌어올려 졌다. 저와 비슷해 보이던 체격에 비해 비현실적으로 강한 힘에 숨이 턱 막혔다. 버둥대던 차에 저를 노려보는 눈동자가 창살처럼 심장을 꿰뚫는 듯해 미도리야의 눈에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저, 저기, 대체 누구, 세요?”
“농담 따먹기냐? 오호, 자신이 있다 이거지. 내가 요기는 깎였어도 힘은 그대로거든?”
“아니, 저, 진짜 댁을 모르는데요! 여기도 처음 와봤어요!”
“…하?”
한껏 부정하는 진심을 느꼈는지 미남이 한쪽 눈썹을 슥 올렸다. 미심쩍다는 눈으로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그에게 미도리야는 연신 고개를 흔들었다. 미남은 멱살을 잡은 손을 휙 당겼다. 목덜미에 바짝 코를 들이대 킁킁 냄새를 맡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감이 온 모양이었다.
“얼굴도 그렇고, 냄새가 진짜 비슷한데… 해괴한 차림이나 하고 있긴.”
“이, 이상하지 않아요. 이런 옷은 되게 흔하거든요!”
“거짓말하면 죽여버린다.”
“정말이에요! 아니, 그리고!”
미도리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죽기 살기로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당신, 인간이 아닌 거죠? 현대 사회는 다들 그런 거 안 믿거든요! 아주 예전이면 몰라도요! 바쿠고는 헛소리 그만하라는 듯이 다른 손으로 한 대 패려다 멈칫했다. 뭐라고? 슬슬 심각해졌는지 낮게 깔리는 그의 목소리에 미도리야는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아무래도, 음, 그쪽이 잠들어 있던?”
“봉인이다. 네놈이 했잖아.”
“아, 네. 진짜 제가 한 게 아니지만! 혹시 봉인되어 계셨던 동안 시간이 엄청나게 흐른 게 아닐까요…? 왜 지금 깨어나신 건지는 알 수 없지만요.”
미도리야는 속으로 덧붙였다. 그것도 하필이면 내가 여기 있을 때인지도요. 인외의 미남은 침묵했다. 끝이 땅에 아슬아슬하던 미도리야의 발이 안정적으로 지면에 닿을 만큼 멱살을 쥔 손을 내린 그는 이내 주고 있던 힘을 탁 놓아버렸다. 풀려난 미도리야가 이제야 살 것 같아서 모자랐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잠시간 띵해 오는 뇌를 어찌어찌 달래고 그럼 이만 실례했다며 잽싸게 도망치려던 미도리야를, 상대가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어깨였다. 미도리야는 뻣뻣하게 굳은 몸을 감추지 못했다.
“저… 놔주시면 안, 될까요…?”
“야.”
“네?”
“날 데려가라.”
“네에에?!?”
어색하게 웃던 미도리야는 상대의 마지막 말에 그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미남은 시끄럽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고 반복했다. 네가 풀어줬잖아. 게다가 나를 가둔 놈이랑 닮기까지 했으니 뭔가 관련이 있겠지. 아직 봉인되어 있는 요기가 돌아올 때까지, 날 책임져 줘야겠다. 너무나도 뻔뻔하고 당당한 선언에 미도리야의 사고思考가 그만 파업을 선언했다. 뇌가 더는 일하는 것을 거부한 나머지 여태 아슬아슬하게 붙들었던 정신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쓰러지는 자신을 붙들며 소리치는 미남을 끝으로, 미도리야는 생애 처음으로 기절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