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여느 평범한 나날과 다르지 않았다. 사신 후계자 넷은 아침에 멀쩡히 일어나 아침밥을 먹었다. 그 뒤 학교로 가 공부를 하거나 중앙에 남아 수련을 하고, 집안일을 하며 각자 자신의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고 있었다. 어느덧 오후가 되었을 때까진 분명 그랬다.
다녀왔습니다. 주은찬과 백건이 하교해 막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는 그때, 부엌이 있던 부근에서 달려 나온 현우가 외쳤다.
“주작 공자, 백호 공자! 큰일입니다!”
“뭐?”
뒤이어 폭발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가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콜록콜록 거센 기침 소리가 들렸고, 자욱한 연기가 조금 옅어질 때쯤에서야 셋은 급히 밖으로 나왔다. 맑은 공기를 들이쉬며 새삼 산소의 고마움을 깨달았다고 숙연해진 현우에게 주은찬이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웬 폭발?”
“부엌에서 일어난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청룡 공자가 미쳤나 봅니다. 저녁 준비 미리 하겠다더니 저 꼴을 만들었어요.”
“청가람이? 요리하는데 실패했다고?”
주은찬과 백건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 못지않은, 아니 제법 상위권의 주부 스킬을 지닌 청가람이 요리를 하면서 폭발을 낸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럴 만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라면 끽해야 하나였다.
“현우 네가 옆에서 약을 올린 거 아냐?”
“천만에요! 제가 왜 그러겠습니까. 그저 주작 공자와 백호 공자가 올 때가 다 되었다고 했을 뿐이라고요.”
“거짓말 같은데?”
현우를 향한 주은찬과 백건의 눈에 불신이 가득했다. 현우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더니 과장스러운 몸짓으로 부엌 쪽을 가리켰다. 가서 직접 물어보세요. 전 진짜 그 말밖에 안 했습니다. 진지한 현우를 한 번, 그가 가리킨 쪽을 한 번 번갈아 본 둘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궁금한 동시에 요리를 망친 청가람이 다시 저녁밥을 준비할 것인지도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창 배고플 나이에 식사에 대한 것은 중요하기 짝이 없었다.
“저기, 가람아?”
아직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부엌에 들어서며, 먼저 주은찬이 조심스럽게 그곳에 있을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청가람의 까칠한 성격이 보통이 아닌 만큼 온갖 화를 내고 있을 거라 단단히 각오한 상태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청가람은 등을 보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리 그가 사신 후계자 중 가장 강하다 해도 갑작스러운 폭발에서 혼자 멀쩡할 거라는 확신은 없었던지라, 주은찬은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가람아.”
“나가. 내가 치울 거니까.”
괜찮으냐는 물음은 미처 나오기도 전에 날카롭기 그지없는 기세에 막혔다. 서릿발이 내려앉은 차가운 목소리로 청가람은 축객령을 내렸다. 요새 그럭저럭 괜찮은 기분이었던 것 같은데 대체 어째서 저러는지 주은찬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한숨을 쉬고 나가는 것뿐이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 하긴 했지만, 저런 상태의 사람을 굳이 건드려봤자 좋게 풀리긴 힘드니 나중에 슬쩍 접근하는 수밖에. 사람에 대해 낙관적이나 정확히 바라보는 주은찬의 판단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나가자며 백건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나 백건은 먼저 가라는 듯 눈짓으로 신호했다.
‘빽건 너 진짜… 일이 더 커지면 어쩌려고.’
‘알아서 할 거야.’
“나가라 했지!!!”
속닥속닥 같이 나가자느니 혼자 먼저 가라느니 소리 죽여 실랑이하던 둘의 대화를 끊은 것은 청가람의 고함이었다. 변성기가 제대로 오지 않아 여즉 소년 같은 그 목소리가 깨진 유리같이 날을 세웠다. 주은찬은 일단 입을 다물고 물러섰다. 움직일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백건에게 눈총을 한 번 주고, 주은찬은 그대로 가버렸다. 이제 부엌에 남은 사람은 청가람과 백건 둘 뿐이었다.
“청룡.”
“너도 나가.”
“삐죽이.”
“나가라고.”
놀랍게도 청가람은 자신을 부르며 다가오는 백건을 공격하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버릇을 고쳐주겠다고 여의주를 소환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청가람은 지금 백건에게 무방비하게 등을 보인 채 나가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백건은 미소를 지었다. 한 발자국 정도를 남긴 사이에서 멈춰선 백건은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가람과 더 가까워졌다. 가람의 귓가에서 백건은 속삭였다.
“소리, 더 안 지르네?”
“….”
“그건 나라서 그런 거야?”
“닥쳐.”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이 눌러 참은 목소리였다. 그의 경고를 무시한 채 백건은 천연덕스럽게 청가람의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청가람은 흠칫 놀란 것을 숨기지 못했다. 백건은 그에게 닿은 자신의 손에 전해지는 미약한 떨림을 느꼈고, 보다 즐거워졌다. 그의 웃음이 짙어졌다.
“왜 떨어? 싫어서 그래?”
“그래. 그러니까 떨어―”
“그럴 리가 없는데.”
넌 날 좋아하잖아. 쐐기를 박은 백건의 말은 청가람을 추락시켰다. 백건은 청가람이 등을 돌리고 있어 볼 수 없음에도 그가 지금 짓고 있을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입술을 깨물고, 미간을 좁히고, 발간 눈매가 어여쁠 것이다. 한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는 고운 얼굴의 화룡점정이겠지. 백건은 위로하듯 붙잡은 청가람의 어깨를 토닥였다.
“부정하지 않네. 상관없나?”
“….”
“지금까지 잘 숨겨왔으면서, 다른 둘한테까지 들키고 싶은 거야? 너도 부끄러울 거고, 나도 아직은 좀 그런데.”
청가람은 질끈 눈을 감았다. 자신을 놀리는 상대의 목소리가 독이 되어 스며들었다. 어쩌다가. 대체 어째서. 하필이면. 백건의 동물 같은 감을 얕보아서는 안 되는 거였다. 미처 스스로 자각하기도 전에 저의 감정을 알아챈 그는 오만한 폭군같이 휘둘렀다. 청가람이 생각하기에 백건은 뱉는 말과는 달리 진정 같은 의미로 저를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기어코 인정하게 만들고, 거리를 좁히고, 내키는 대로 닿아오는 그 일련의 모습에는 자신처럼의 무게가 없었다.
어린애의 한갓 장난감이 되어 놀아나는 기분에 청가람은 분노했고, 슬퍼했고, 증오했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쳐 한 사람을 향하는 감각은 이전에도 겪어본 적이 있었다.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동기가 된 아비 못지않게, 백건은 뒤흔들었다. 청가람은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재미가 없다며 혀를 차는 백건의 무료함에 어울려주고 싶지 않은 동시에, 어깨로 전해지는 상대의 온기가 피부를 타고 심장으로 흘렀다.
이것이 애증일까. 백건이 제 몸을 돌리게 해 입을 맞춰오는 것이 황홀했다. 감은 눈은 뜨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