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새벽과 아침의 경계에서야 지난밤의 꿈이 깨졌다.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켜고 침대를 벗어나는 일련의 습관적인 동작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창가의 커튼을 밀어보니 그림자처럼 어둑한 아파트 단지의 형체 너머, 저 멀리 수평선에서 하루의 시작이 떠오르고 있었다. 멍한 뇌가 온전히 깨어날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다 퍼뜩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 바로 준비하지 않으면 지각할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 섰다. 욕실로 돌린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출근해야지? 아침 먹고 가렴.”
“잘 먹겠습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희미하던 맛좋은 냄새가 더 강해졌다. 거의 다 차렸으니 와서 앉으라는 어머니의 말에 그대로 따랐다. 드르륵 밀려나는 의자 소리에 뒤이어 모자간 소소한 대화가 이어졌다. 아버지는요? 먼저 나가셨어. 요즘 일이 바쁘다던데, 이즈쿠 너희는 안 그러니? 전 그럭저럭요. 늘 비슷하죠. 거실에 놓인 TV가 켜져 있는지 뉴스를 전하는 앵커의 단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최근 청년 실업자가 늘고 있는 가운데, 전문가의 견해로는 다양한 개성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제대로 형성되어야 한다고―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만난 동창도 자식 취업이 아직이라고 한숨을 쉬더라. 이 엄만 정말 복 받았지 뭐야.”
“복 받았다고 할 것까지야….”
“아니지. 얼마나 잘 된 거니? 안정적인데다, 더 안전하기도 하고.”
마침표가 찍힌 문장 앞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 짐작하기란 쉬웠다. 히어로가 되지 못했지만, 혹은 히어로가 하는 일보다 등등. 미도리야는 그저 웃었다. 평온한 일상이 이 정도로 우그러질 리가 없다. 잘 먹었다며 일어나 현관에서 신발을 신기까지 자리한 미소는 여전했다. 배웅해주는 어머니는 깜빡 잊었다는 것처럼 확인했다.
“아참, 집은 다 알아봤니?”
“후보 두엇 골라놨어요.”
“독립은 좀 미뤄도 될 텐데. 여기서 돈도 더 모으고….”
“괜찮아요.”
다녀오겠습니다. 제법 단호하게 제 뜻을 관철한 미도리야는 그대로 길을 나섰다.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MP3 플레이리스트에서 뭐든지 될 수 있다던 노래를 지운 지 오래다. 오늘은 유달리 날씨가 맑았다.
*
미도리야 이즈쿠는 경찰이 되었다. 절대다수가 지닌 개성을, 사소한 무엇이라도 지니지 못한 몸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진로희망서를 고쳐 점수에 맞춘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본래 적어 넣었던 유에이 고교에 갈 수 있을 성적이면 어디든 가능할 거라던 담임의 말이 옳았다. 고등학교 입학식 날, 미도리야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경찰이 될래요. 그리곤 저를 낳아준 이가 다시금 눈물을 터뜨리며 사과하는 것을 달랬다. 모두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고. 자기야말로 빨리 인정하지 못해 미안했다고.
히어로가 되고 싶어 공들이던 노력을 다른 곳에 쏟으니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단과 대학을 졸업해 경찰 시험에 합격하는데 장애물이라곤 없었다. 빳빳하게 다린 새 제복을 입고는 직장 동료가 될 이들에게 인사하고, 맡겨진 업무를 하고, 마치 평범한 삶의 표본처럼 지냈다. 사소한 것이라도 잘 도와준다고 주민들의 평이 좋다는 말에 미도리야는 수줍어했다. 가끔 인사를 주고받던 아이에게서 선물이라고 사탕을 받기도 했다.
바닷가의 곱게 갈린 모래알처럼 순탄한 말단 순사의 업무 중 가장 위험한 일은 히어로에게서 빌런을 인계받을 때였다. 연락을 받고 현장에 갈 때마다 제압당했으면서도 가끔 틈을 노려 달아나거나 해를 끼치려 하는 경우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당부는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어오곤 했다. 미도리야는 이번에도 알겠다고 말하며 경찰차 문을 열었다.
“히어로 누가 왔대요?”
“빌런이 제법 강해서 여럿이 몰렸다던데.”
“그래요?”
“왜, 사인이라도 받게?”
운전대를 잡은 동료의 옆에 앉아 물으니 태연한 답이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히어로와 관련해 미도리야의 이런 태도가 하루 이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아예 이제는 히어로의 ㅎ자만 나와도 다들 미도리야를 돌아보곤 했다. 그라면 분명 뭐든 알 거라는 믿음이 생겼으므로.
“업무 중이잖아요.”
“눈은 반짝반짝하면서? 한 번쯤은 원하는 대로 해도 되잖아. 모르는 척해준다니까?”
“말씀은 고맙지만, 아녜요.”
가볍게 사양하는 동안 어느새 현장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눈보다 귀로 먼저 알았다. 많은 이들의 감탄과 박수가 겹쳐 증폭했고, 일찍 냄새를 맡고 몰려든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요란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난리인 걸 보니 그저 그런 급의 히어로가 온 건 아닌 모양이었다. 미도리야는 대체 누구일지 속으로 추측해보았다. 신인일까? 이런 함성이면 중견 아니면 대형 루키일 텐데―
그 순간, 시야에 한 사람이 박혀 들었다.
다리가 순식간에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느려지다 멈춰버렸다. 함께 가던 동료는 현장의 분주함에 정신이 팔려 미도리야의 이변을 모른 채 앞서 나갔다. 물에 잠겨 듣는 것처럼 귀에 닿는 온갖 소리가 먹먹해진다. 바라본 상대가 쓰러진 빌런의 등 위에 한쪽 발을 올리고, 땀에 젖은 이마를 슥 손으로 훔치는 동작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고 생생하게 망막에 꽂혔다. 사람들이 흥분에 겨워 히어로 네임을 외쳐대고 있다는 것만 겨우 알았다.
폭살왕! 폭살왕이다!
미디어를 비롯해 온갖 커뮤니티에 혜성처럼 등장해 인지도를 쌓아간 히어로, 각자 살아가기 바빠 꽤 오래 안부를 묻지 못한 소꿉친구가 지척에 있었다.
미도리야는 뒤늦게 돌아본 동료가 이리 오라 손짓할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제 이름이 불리는 것과 동시에 시선을 붙잡은 이가 눈을 마주할 때까지였다. 미도리야는 화들짝 놀라 서둘러 다가갔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왔다던 히어로가 너였다니 놀랐다? 결정할 수 없었던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지극히 사무적이고 공적인 태도였다.
“인계 절차, 받겠습니다.”
“….”
꾸벅 고개 인사를 하고는 빌런을 묶는 미도리야에게 폭살왕, 바쿠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화할 가치조차 느끼지 않는다는 걸까. 중학교 때를 생각하면 충분히 그리 여길 만도 했다. 결국 그가 말한 대로 자신은 포기했고, 지금에 이르렀으므로. 미도리야는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새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이대로 스쳐 지나가고, 다시금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나 활약을 알게 되겠지. 분명 그럴 터였다.
그러나,
옛말에 불운은 틈을 노려 일어난다더니, 예상치 못한 만남에 정신이 팔렸던 미도리야는 인솔하던 빌런이 갑자기 제 쪽으로 몸을 날려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무개성인 이상은 아마 똑바로 경계하고 있어도 피하기 힘들었으리라. 통증이 찾아든 것도, 위아래가 반전된 것만 같은 찰나도, 충격과 함께 의식을 놓은 것도 순식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눈에 비친 것은 두꺼운 장갑을 끼고 자신을 향해 뻗은 손이었다. 마치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는 듯한.
‘캇짱이 다급해 보이다니, 어째 낯선데.’
의식을 잃기 직전에 든 생각은 우습기 그지없었다.
*
내민 손은 언제나 내쳐진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뻗어봤자 도저히 닿지 않아서, 결국 멀어져가는 등조차 막을 수 없다는 것만 깨닫고야 만다. 결국 어린 자신은 팔을 늘어뜨린다. 미도리야는 얼룩덜룩 상처입고 울먹거리는, 현실이 아닐 아이를 달래지 않았다. 미안하다고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그때의 나에겐 아직 와 닿지 않았을 테니까.
미도리야는 흐릿하던 의식을 붙잡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버린 걸까. 점차 또렷해지는 지각은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주변 환경을 민감하게 잡아냈다. 붕대가 감겼다는 답답함이 가장 먼저였고, 다음으로 병원 특유의 싸한 공기가 살풋 달콤한 냄새를 얹어 코를 찔러왔다.
하나둘 감각을 일깨우느라 미도리야는 곱게 눕혀진, 다소 무겁게 느껴지는 제 몸 옆에서 소리 없는 타인만이 자리했음을 몇 초가 지나서야 알아차렸다. 부모님이나 간호사로 착각하기에는 존재감이 지나쳤다. 미도리야는 그를 불렀다. 잠겨 갈라진 발음이 침묵을 긁었다. 상대는 미도리야가 깼다는 걸 진작 알았다는 것처럼, 심드렁한 태도로 응했다.
“깼냐. 아픈 곳은?”
“글쎄… 이곳저곳 쑤시는 것 외엔 괜찮은 것 같은데.”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대화가 트였다는 게 신기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게 된 원인인 빌런에게 감사라도 해야 하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미도리야는 바쿠고를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가쿠란 차림의 기억 속 모습보다 키가 컸고, 몸의 선에는 각이 졌다. 목소리도 더 낮아진 것 같고… 멋있어졌네. 속으로 감탄하던 미도리야는 잠시 마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잘 지냈어? 유명해졌더라. 벌써 우리 시의 자랑이야. 하하, 나는 어떠냐고? 제복 보면 알다시피 경찰이지. 아직 승진이고 뭐고 없는 말단이라서, 평소에는 위험한 일이라곤 드물어. 이번이 유독 달랐던 거고.
“그러니까, 괜히 여기 더 있지 않아도 돼.”
별다른 동요 없이 쐐기를 박았다. 바쿠고는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자빠졌냐는 눈빛이 쏘아지자 미도리야는 조건반사적으로 움찔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 잠시 이것저것 고민했지만, 딱히 나오는 답은 없었다. 미도리야는 머리와 팔 등 붕대가 감긴 곳을 가볍게 톡톡 쳤다. 캇짱이 여기 더 있어야 할 이유가 있어?
“전적으로 내가 부주의했을 뿐인데.”
부상이라 해봤자 큰 것도 아냐. 잠깐 잤다가 일어난 셈 쳐도 될 만큼 사소한걸. 아, 혹시 인터뷰에 내가 필요한 거야? 바쿠고는 부정했다. 까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미도리야는 곤란한 듯이 우물쭈물했다. 그럼 대체 뭐지. 이제 와서 그와 자신 사이에 더 할 얘기가 뭐가 있다고.
…아, 혹시 그건가. 쉴 새 없이 여기저기 옮겨가던 미도리야의 시선이 바쿠고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짧은 침묵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의미로 끊어졌다. 여상한 어조로 폭탄이 떨어진다.
“동정하니?”
네가, 나를? 혼잣말이 섞인 의문은 계속 이어졌다.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이상하지. 내가 알았던 캇짱은 도저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삶의 절반 이상을 같은 곳에서 먹고 자라고 어울렸으니 그 정도는 안다고 해도 되지 않으냐면서, 미도리야는 흐리게 웃었다. 고작 요 몇 년이 너를 바꿨다고 하진 말아줘. 정말 그렇다면 최악이잖아. 바쿠고의 눈이 커졌다. 놀란 걸까. 오늘은 정말이지 이상한 날이었다. 만난 것, 내가 깨어날 때까지 기다린 것, 네 눈에 비친 나를 볼 수 있을 만큼 우리가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까지. 막연히 가능할 거라 여긴 적도 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캇짱은 저 위로 가고, 나는 본래 있어야 할 밑에서 걷고.”
“…….”
“이제 네가 원하는 대로 다 되었는데, 왜 만족하지 않아?”
미도리야는 바쿠고의 굳은 얼굴과 침대 아래에 가려 보이지 않는 주먹을 지적했다. 분노를 삭이는 듯하던 바쿠고가 입술을 깨물었다. 상처가 나기 직전까지 힘을 담았는지, 곧 잇자국이 남은 곳이 아슬아슬하게 붉어졌다. 흰 피부와 어울려 더 도드라져 보이는 것이 마치 바쿠고 자기 자신 같았다. 어딜 가건, 누구와 있건 평범하게 묻혀 있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제 특별함을 주장하던 이가 입을 열었다.
“데쿠 너, 알고 있었지.”
무엇을 말하는 거냐고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미도리야의 웃음이 살짝 옅어졌다. 미소와 무표정 사이에서 바쿠고를 직면하던 눈동자가 살짝 눈꺼풀에 가려졌다. 긍정의 의미를 담은 머리가 작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모를 수가 있나. 바쿠고의 개성이 발현된 이후로 점차 교류라 할 만한 것은 줄어들었고, 일방적인 멸시가 주어지곤 했던 것마저 고등학교에 달리 가게 된 이후부터는 기회가 없다시피 했다. 주말에 우연히 외출이 겹칠 때는 제외하면 얼굴 볼 일도 드물었다.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오래 이어지는 인연이란 대개 서로에게 호감을 가진 관계에 노력이 더해져야 가능한 것이고, 바쿠고와 미도리야에겐 그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미도리야는 간혹 바쿠고가 저에게 닿아있음을 느끼곤 했다. 딱히 만나지 않아도 일상을 살아가는 틈틈이 타는 듯한 눈길이 따끔하게 찔러 들어오고, 퇴근하는 저녁길의 저 멀리서는 사복 차림의 바쿠고가 시야에 들어오곤 했다. 그래. 솔직히 인정하자. 말을 걸자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수많은 기회를 무시하고 피한 건 분명 미도리야였다. 그것이 지금의, 공적인 사고가 일어나버린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어째서냐?”
미도리야는 한숨을 쉬었다. 눈앞의 상대는 그럭저럭 얌전한 추억으로 저를 남겨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바라던 방향대로 끝나지 않을 듯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미도리야는 결국 솔직해졌다. 스스로 덮어둔 밑바닥의 한 조각을 드러냈다.
“너를, 캇짱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사실 좀 어이가 없기도 했다. 장래 유망한 히어로가 될 만한 명석한 두뇌라면 이미 짐작하고도 남았을 텐데. 타고나길 연기나 숨기는 데에는 재능이 없어서, 그저 열심히 마주하지 않았던 제 모습에서 거부를 찾는 것은 아주 쉬웠을 터였다.
…그런데 대체 왜, 지금 이 순간의 너는 상처 입은 것처럼 보이는 걸까.
미도리야는 눈을 감았다.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것도, 이해하라고 부탁하는 것도 싫었다. 그 대상이 바쿠고 카츠키라면 더더욱. 미도리야는 이제야 스스로가 지쳐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찬란하게 갉아 먹힌 동심이 스러진 그때부터, 줄곧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것을.
*
작은 운동화 밑창이 땅에 닿고 떨어지는 소리가 등으로, 귀로 전해져왔다. 멈추거나 돌아보지 않은 채 보통의 속도보다 살짝 빨리 걷고 있노라면 점차 숨이 흐트러지다가, 결국 조금만 천천히 가달라고 나를 부르고야 만다. 이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습관처럼 당연했다. 나를 앞서갈 리 없는 너라는 존재가.
그래서 안심했다. 벌어진 거리가 좁혀질 기미가 없이, 돌아봐도 아무도 없는 것만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그날, 병원에서 미도리야가 보인 외면에 바쿠고는 맞서지 않았다. 멀쩡하지 않은 눈과 얼굴로 다시 오겠다며 한발 물러나 버렸다. 거기서 미도리야는 모든 게 끝났다 여겼다. 이대로 다시는 서로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지. 씁쓸한 안도가 어깨를 짓눌렀다.
안타깝게도 미도리야가 단 하나 간과한 점, 바쿠고가 훨씬 집요했다는 것이 예상을 뒤엎었다. 입원 기간은 물론 퇴원해 집에서 며칠 요양하는 내내 매일같이 찾아오는 바쿠고를 미도리야는 문전박대하지 못했다. 유망한 히어로가 된 소꿉친구가 성실하게 병문안을 와준다고 기뻐하는 주변을 실망시킬 수 없었으므로. 바쿠고는 미도리야가 가족과 지인 앞에서마저 매몰차진 못하다는 걸 십분 이용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미도리야는 바쿠고를 같은 공간에 들이는 것만을 허용했다. 매 방문마다 침묵이 강처럼 흘러 둘 사이를 단단히 가로막았다. 바쿠고는 넘어오지 말라 단단히 가시를 세운 고슴도치처럼 예민한 미도리야를 관찰하듯 훑어댔다. 그렇게 피로한 시간이 하루, 이틀 지나다 오늘이 되어버렸다. 이제 어떻게든 진정한 결판을 내야 한다는 걸 바쿠고와 미도리야 모두가 암묵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병가 마지막 날이라며.”
“…응. 내일부터 다시 출근할 수 있을 거야.”
시작은 소소했다. 바쿠고는 문안 선물로 가져온, 과일이 담긴 비닐봉지를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뒤 미도리야를 마주했다. 그 역시 이번 기회 전에는 상대를 가까이서 보지 못한 지 제법 되었다. 몇 년, 누군가는 고작이라고 부를지 모를 동안 미도리야가 자신만큼이나 달라져 있음을 아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실은 단순한 불쾌를 넘어 화가 나는 걸 눌렀다. 많은 사람이 바쿠고가 감정적이라 말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애초에 히어로가 될 수조차 없었을 터였다. 가는 실이 엮이듯 섬세한 합리와 판단이 화끈하게 몰아치는 감정을 뒷받침하는 인간이 바쿠고였다. 그것이 한 사람에게서만 유독 쉽게 찢긴다는 문제가 있을 뿐.
“그동안 와줘서 고마웠어. 일 밀리지 않았어? 바쁠 텐데.”
그러니 돌아가라고, 미도리야가 선제공격을 날렸다. 맞받아치기 전에 바쿠고는 우선 스스로를 갈무리했다. 누구도 믿지 않을, 나는 무해하다는 듯한 위장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반쯤 누운 미도리야가 덮은 이불에 오른손을 올렸다. 긴장하고 있던 미도리야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바쿠고가 그동안 이런 식으로 닿아오려는 제스처를 한 적이 없어서였다.
네가 있는 공간의 밖으로 나서며 입술을 몇 번이나 짓씹었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건만, 미도리야의 거부는 바쿠고에게 꽤 타격이 컸다. 그가 병실에서 당장 미도리야를 윽박지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성 덕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가 보일 인내에 가까웠다. 어디로 도망칠지 확인하고, 최적의 타이밍에 달려들고자 하는 의지를 갈고 닦아 지금에 이르렀으므로. 바쿠고는 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승리야말로 자신의 것이므로.
“보고 싶지 않다고 했지. 네가, 나를.”
대개의 경우 바쿠고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행동이 필요할 때 앞으로 나서기야 자주 했으나, 막상 대화의 물꼬를 틀고 이끄는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러지 말걸. 시답잖은 인사에서 무난하게 본론으로 넘어가는 기술이 다소 부족한 게 뒤늦게 아쉬워질 줄은 몰랐다. 답지 않게 말을 고르고 있으려니 미도리야가 불안해했다. 이상하다는 감을 잡은 걸까. 뭔가 잘못되었다는 막연한 감각이 미도리야의 속눈썹을 떨게 하는 듯했다. 마치 그가 없는 동안의 자신처럼. 그런 생각이 들자 멋대로 목소리가, 문장이 툭 튀어나왔다.
“데쿠, 너만 억울해?”
“뭐?”
이런 젠장. 훅 치미는 유치함에 바쿠고는 혀를 깨물까 고민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경험할 일 없던 수치가 근질근질 올라오려 들었다. 안 그래도 큰 편이던 미도리야의 눈이 경악으로 동그래졌다. 저절로 바쿠고의 고개가, 시선이 살짝 상대를 비켜갔다. 속에 쌓아온 건 미도리야만이 아니라지만, 통제를 벗어난 주둥아리가 수습하기는커녕 실시간으로 상황을 나락으로 밀쳐버리고 있다는 게 참으로 거지 같았다.
“나는 안 그런 줄 아냐고. 눈 마주쳐도 피하고, 멀찍이 도망가는 걸 몇 번이나 겪었다고 생각하냐.”
“그게 그렇게 기분 나빴어? 좀 어른이 되지그래. 불편하다고 하면 적당히 맞춰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캇짱 지금 되게 이기적으로 구는 거, 알아?”
“그러는 너는! 피하는 것도 짜증 나는데, 그딴 눈으로 보고 있잖아!”
그간의 피로가 따끔따끔 울분을 토해냈다. 서로의 감정이 고조되면서 날 선 공기가 피부를 쓱 그어 시렸다. 기어코 분통을 터뜨린 바쿠고가 답답하다는 듯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열이 오르는지 씩씩거리는 미도리야를 골치 아프다는 듯이 보다 혼잣말로 욕을 뱉었다. 젠장, 이러려던 게 아니라고.
“그딴 눈이 대체 뭔데?”
“진짜 모르는 거냐, 아니면 알면서 시치미 떼는 거냐.”
“뭐라도 알면 차라리 낫겠지.”
“…넌 나를, 나 자체로 보질 않아.”
미도리야가 멈칫한 걸 놓치지 않은 바쿠고가 말을 이었다. 살아 숨 쉬는 인간이 아니라, 네가 포기해야 했던 게 뭉친 것처럼 나를 질색했잖아. 그러니 불편해서 피한 거 아니야? 인지하지 못했던 정곡을 찔린 미도리야가 입을 다물었다. 애써 덮어둔 무의식의 허점이었는지 당황조차 숨기지 못한 얼굴을 본 바쿠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처음엔 차라리 안 보는 게 더 낫겠다 싶었는데, 더는 못 참겠어.
“데쿠 네놈이 나랑 같은 길을 걷는 건 무리지.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렇겠지. 알고 있어.”
“그래도 이렇게 멈추면 안 되잖아.”
“하?”
“어떻게든 따라오라고. 히어로가 아니라도, 똑바로 날 보면서.”
그러니까, 네가 그럴 수 있기 위해선―
“미안해.”
바쿠고는 바로 이걸 말하고 싶었다.
바쿠고 카츠키의 인생에서 사과란 참 낯선 미지의 것이었다. 훈련에서, 현장에서 했던 자잘한 실수는 금방 만회할 수 있었다. 그 뒤에 선배들에게 가볍게 죄송하다 흘리고 지나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 데쿠 너에게만큼은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수 없었다. 힐난을 던지긴 했으나 미도리야가 ‘그따위’ 눈을 하게 된 건 바쿠고의 책임도 있었다.
함께 놀며 자란 아이들 중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미도리야의 동경을 받지 못했다. 대단하다는 말도, 멋지다는 감탄을 듣는 것도 오로지 바쿠고였다. 그것이 제 존재가 그만큼 커서라는 걸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철없는 자존심이 내밀어 온 미도리야의 어린 손을 내치고, 무개성을 향한 조롱과 무시에 동조하면서 어그러졌다.
미도리야가 포기해버린 것도, 어긋난 꿈을 제게 덧씌워 피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셈이었다. 중요시하지 않는 이에게 그런 걸 투영할 리가 있나. 미도리야가 왜 그래야 했는지, 단지 변한 시선이 싫어서 그대로 상대의 도피를 수용했던 자신 역시 외면해온 건 마찬가지였다. 바쿠고의 미안하다는 말은 그런 의미였다. 미도리야가 그런 뜻을 전부 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더는 도망치지 말았으면 했다. 진심이라는 것만 알아줘도 괜찮았다. 열이야 좀 받겠지만.
“…맙소사, 정말 캇짱 맞아?”
“안 믿기냐?”
“그럴 만하잖아. 이럴 필요는 없을 텐데.”
“필요해. 네 전부가.”
솔직하게 토로하는 바쿠고 앞에서, 믿을 수 없는 걸 마주한 사람처럼 멍하게 입을 벌렸던 미도리야가 어느 순간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응어리진 얼굴에 얇게 허탈하다는 감정이 섞여들었다. 바쿠고는 그 과정을 똑똑히 새겼다. 다시는 반복하게 두지 않을 테니까. 미도리야에게서 느리게 아픔이 흘러내렸다. 얼음이 녹아 무너지듯이.
“…알고 있었어. 캇짱이 잘못한 게 아니야. 그냥, 그냥 내가 문제였던 건데.”
애초에 무개성이라서 그런 거였는데. 그래도, 그래도 나는, 포기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널 만나면 내가 더 싫어질 것 같아서. 미도리야의 다리를 덮은 이불에 후드득 눈물 자국이 젖어들었다. 바쿠고는 어중간하게 침대를 딛고 있던 오른손을 움직였다. 그것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꽉 쥐어진 상대의 손등에 올려놓았다. 이번엔 미도리야도 놀라지 않았다. 닿았다는 걸 알지도 못하는 것처럼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정말로 캇짱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아니, 사실은 그래도 보고 싶었어. 네가 자랑스럽고 미웠어.
한참을 중얼대던 미도리야의 어깨를 바쿠고의 왼팔이 감싸 끌어당겼다. 힘없이 무너진 미도리야를 품에 안은 바쿠고가 귓가에 속삭였다. 다 좋아. 미워해도 싫어해도 되는데, 보지 말자는 소린 하지 마라.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고. 미도리야는 잠시 입을 닫았다.
“…취소할게.”
“잘했어.”
들릴 듯 말 듯 작게 읊조린 소리를 용케 잡아낸 바쿠고가 미도리야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숱 많은 상대의 머리카락에 푹 제 얼굴을 묻었다. 닿아서 나누는 체온이 따뜻했다. 아마 너도 그렇게 느끼고 있지 않을까.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그렇다 해도 한 걸음 내디딜 수는 있으리라. 나란히 한 줄로 서서는, 어쩌면 손을 잡기도 하면서.
'글 > 2D'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캇데쿠] 상실, 그러나 (0) | 2016.06.10 |
---|---|
[캇데쿠] 동창회 (0) | 2016.06.10 |
[캇데쿠] 사소한, 나름 진지한 (0) | 2016.05.02 |
[캇데쿠] 귀여워 (0) | 2016.03.01 |
[스팁크라] 밤의 고백 (0) | 2016.0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