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각자 자신에게 걸맞은 자리가 있다. 미도리야 이즈쿠를 어릴 적부터 짓눌러온 그 명제는 일견 타당해 보였다. 개성뿐만 아니라 선천적이건 후천적이건 아주 많은 부분에서 개인은 타인과 달랐고 그에 따라 정해지는 위치, 계급, 공고해지는 인식과 편견이라는 놈은 한 사람의 생을 구성하며 정의하고야 만다.
미도리야 역시 이것에 별다른 이견은 없었다. 다만,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게 있었을 뿐이었다. 히어로가 되고 싶다는 오랜 꿈이 순응하려는 이성을 짓눌렀던 것이다. 그마저도 용서할 수 없다고 주먹을 휘두르는 현실로 인해 포기할 뻔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미도리야는 딱 하나만 욕심을 내기로 했다. 오직 하나만, 올마이트에게 부끄럽지 않은 히어로가 되자고. 제 우상이 선사해준 유일한 예외를 붙잡기도 버거운 스스로를 너무 잘 알아서 그 이상의 무엇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옆자리에 누군가가 와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할 수가 없었다. 목표를 향해 힘껏 달리기도 힘들었다.
“미도리야! 러브레터 받았다면서?”
“그런 거 아냐. 그냥 몇 시에 어디로 나와 달라고만 쓰여 있었는데…”
“에이, 하트 스티커로 봉해진 분홍색 봉투라며? 틀림없네. 고전적이지만 괜찮지―”
“네 신발장 근처에 여자애가 얼쩡거렸다는 소리도 파다해 지금! 1학년 일반과의 모리,”
“으아아아!”
놀리는 어조로 편지를 보냈을지 모를 여학생의 이름이 밝혀지는 만행을 멈추고자 미도리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우적대며 크게 휘둘러지는 팔과 붉어진 얼굴은 처음 겪는 일에 무척이나 당황했음을 조금도 숨기지 못했다. 그 수줍음에 미도리야를 둘러싼 이들이 웃었다.
“숙맥일 것 같더니 예상대로냐.”
“하지만 언제고 한 번은 이럴 줄 알았다고 나는. 미도리야가 가끔 팍! 하고 멋지게 보일 때가 있단 말이지.”
“동의동의! 여자애들 사이에선 은근히 그런 얘기 꽤 나왔거든. 멋있지만 차갑거나 화 잘 내는 사람보단, 오히려 미도리야처럼 상냥한 타입이 괜찮다는 애들도 있더라.”
“너희들은 언제 그런 수다를 떤 거야 대체.”
슬슬 일어날 일이었다며 짐작하고 있었다는 사람도 있고, 전혀 모르고 있던 걸즈 토크의 내용에 혀를 차는 사람도 있었다. 본의 아니게 학급의 태풍의 눈이 된 미도리야는 어느새 슬그머니 상승한 제 평가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차마 발도 구르지 못하고 얼어있는 미도리야의 어깨를 잡은 이이다가 절도 있게 안경을 올리며 진지하게 말했다.
“미도리야, 나는! 훌륭한 히어로가 되기 위해선 불건전한 이성 교제는 자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이다 너도 딱 경험 없다는 티가 너무 난다고. 요즘 연애 정도는 다들 한다.”
“부럽다… 사귀게 되면 그렇고 그런 짓도 마음껏 할 수 있겠지! 너무 부럽다! 나도오오오!”
혼잣말로 시작해 외침으로 끝난 미네타의 흑심은 모두에게 무시당했다. 왁자지껄, 결과가 어찌 되건 남자라면 일단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친구들의 들썩임에 밀린 미도리야는 뻣뻣하게 자리에 다시 앉았다. 책상 서랍 안에 넣어둔 편지가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처럼 느껴졌다. 저절로 머리가 바닥을 향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은 그때였다. 그렇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려니 따끔한 시선이 찔러온 것이다. 미도리야가 머리를 들어 상대를 확인하려 하자 그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버렸다. 의아하던 찰나에 반에 소란을 가져왔으니 누군가는 성가셨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져선 정체 모를 급우에게 속으로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는 미도리야를 주시하는 사람은 더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
“끝났다!”
“미도리야, 잘 다녀와!”
“결과 보고해라.”
기다렸는지 아닌지 모를 하교 종이 울렸다. 서로서로 잘 가라는 인사를 나누는 시간, 다들 미도리야에게 한 마디를 더했다. 늘 집에 함께 가던 이이다와 우라라카도 먼저 가보겠다며 힘내라 응원하자 미도리야는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내일 보자는 말만 겨우 했다. 아마 오늘의 하교길은 내일을 기대하는 아이들의 수다로 시끄러울 터였다.
못해도 삼 분의 이 이상이 먼저 교실 문을 빠져나간 뒤에야 미도리야는 겨우 다리를 움직였다. 두 손으로 편지를 꼭 잡은 채 불안정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고, 처음 편지를 발견했던 일층 신발장을 막 지나치려던 때였다. 있었는지 몰랐던 타인의 신체가 미도리야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신발장 측면에서 다리만 들어 보란 듯이 막아 세우니, 미도리야는 하마터면 거기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비틀거리다 못해 그만 손에서 편지를 놓쳐버리자 그것은 걸림돌이 된 다리 근처로 팔랑팔랑 날아갔다.
“아, 잠깐!”
미도리야가 편지를 주우려 엉거주춤하게 허리를 숙였다. 상체가 더 앞으로 가면서 길을 방해한 사람이 언뜻 보였다. 미도리야는 처음 목적을 잊고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한쪽 다리를 저를 향해 들고 바지 주머니에는 손을 넣은, 삐딱한 자세의 바쿠고 카츠키였다. 미도리야는 불에 데인 듯이 파드득 상체를 다시 세웠다. 그런 미도리야의 행동을 보는 바쿠고의 얼굴은 뚱했다. 화를 내거나, 살기를 담아 웃거나 할 때는 제외하면 대개 짓곤 하던 표정이었다.
“카, 캇짱. 아직 집에 안 갔어?”
“…….”
답하지 않은 바쿠고가 가만히 그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편지를 집어 들었다. 엄지와 검지만 사용해 어쩐지 더러운 것을 만지듯이 그러는 바람에, 미도리야는 당황한 와중에도 그러지 말라고 말릴 뻔했다. 겨우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말을 그대로 묻어둔 미도리야는 부탁했다. 돌려줘. 바쿠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부러인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어딘지 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가 낯설고 이상했던 미도리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더 강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그거 돌려줘.”
“왜?”
“왜냐니, 내가 받은 거고… 갈 데가 있으니까 비켜줘.”
말을 하면서 조금이나마 진정한 미도리야는 바쿠고를 똑바로 응시했다. 바쿠고는 그런 미도리야를 빤히 바라보다, 같잖다는 듯이 웃어보였다. 이를 드러낸 웃음은 절대 즐겁다는 표현이 아니었다. 미도리야의 몸이 절로 긴장했다.
“데쿠 너, 이딴 시시한 게 좋냐?”
“시시하다니.”
“너드 따위는 순식간에 차인다. 금방 질려 할걸.”
“말이 심해. …혹시 그렇다고 해도, 캇짱은 상관없잖아.”
욱한 미도리야가 반박하자 바쿠고의 눈이 치켜 떠졌다. 조금 전 반에서 느꼈던 것처럼 강렬한 시선을 받은 미도리야는 자기 자신에게 놀라버렸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다수가 예상하는 그대로의 목적일 순 있지만, 어째서 사귈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인정한 듯이 말해버린 걸까. 자신은 정말 고백을 받는다 해도 받아들일 순 없었다. 이이다의 말대로 진정한 히어로의 길을 걷기도 부족한데. 어째서?
아니다.
어째서가 아니었다.
미도리야는 입술을 깨물었다. 애써 눌러두었던 것이 바닥을 차고 심장을 때려대는지 가슴이 욱신욱신 아팠으나 바쿠고 앞에서만큼은 절대로 울고 싶지 않았다. 쉽게 눈물을 보이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멋대로 터지려는 눈물샘에게 버텨달라고 속으로 사정하면서, 미도리야는 자신의 멱살을 잡아채 당기는 바쿠고의 손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두 사람의 코가 맞닿을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바쿠고의 홍채가 선명히 보였다.
미도리야는 힘을 주어 흔들어대는 바쿠고의 손에 제 손을 얹었다. 떼어내려는 동작이 아니라 마치 기댈 것이 필요해 잡은 듯한 간절함이 있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는지 바쿠고는 팔의 움직임을 멈췄다. 아무런 행동도, 말도 없이 고정된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둘은 쫓고 피하고, 추궁하고 숨기를 반복했다. 미도리야는 잡아먹을 듯한 기세의 바쿠고로 인해 눈이 부셨다.
형체 없는 추격전이 이어지다 마침내 바쿠고가 탁하고 손을 놓아버렸다. 미도리야는 한없이 가까웠던 거리를 벌려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기어코 축축해진 눈가가 신경 쓰이던 차에 바쿠고는 담담하지만 어이가 없다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데쿠 네놈이 멋있다니, 다들 눈이 삐다 못해 빠지기라도 한 모양인데.
“차라리 귀여운 편이라고. 토 나오지만.”
“…뭐?”
미도리야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잘못 들었나 했으나 조용한 장소에서, 이 정도의 거리에서 그럴 확률은 매우 낮았다. 미도리야가 얼이 빠져버린 찰나에 바쿠고는 몸을 돌려 먼저 발을 떼었다. 멀어지는 바쿠고의 속도는 평소와 비슷했으나 오랫동안 스토커 못지않게 바쿠고를 지켜본 미도리야 정도만이 알아볼 수 있는, 미묘하게 빠른 수준이었다.
미도리야의 굳은 머리는 미처 닦지 못한 눈물이 볼로 주르륵 흘러내린 후에야 조금씩 사고를 할 수 있었다. 그대로 다리에 힘이 빠져 후들후들 주저앉아버린 미도리야는 뒤늦게 떠올렸다.
‘캇짱, 편지 안 돌려줬어.’
옆에 둘 엄두가 안 난다는 건, 현재로도 넘치게 힘들다는 건 단순히 발전이나 수행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실은 다른 사람은 필요가 없었던 거다. 너무 오랫동안, 이미 바라는 대상이 있었으니까.
미도리야는 얼굴을 가렸다. 보이고 싶지 않은 속내가 그대로 드러날 것 같았다. 의식도 못 하게 숨겨두었는데. 깨닫고야 말았다.
분수를 알아야지.
지금만으로도 버거운데.
―욕심이 생기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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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선을 모르겠다 싶으실지도... 간단히 말하면 쌍방 짝사랑인데 바쿠고는 어느 정도 쌍방인 걸 짐작했고/미도리야는 무의식 저편으로 묻어뒀다는 전제입니다(m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