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사렘즈 로트, 세계의 균형이 어그러진 비상식의 도가니탕의 밤은 평온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라이브라의 심장부에서는.
“연모하고 있네.”
“뭐?”
스티븐은 우선 막 넘기려던 커피를 뿜지 않은 자신에게 감탄했고, 다음으로는 사는 동안 몇 번 해보지 않았던 반성을 이었다. 이제 몸도 예전같이 쌩쌩하지 않은데 역시 무리였나. 환청이 들리는 걸 보니 한 이틀은 깨지 않고 자야 할 판인가 보군. 자가 진단을 내린 스티븐은 오늘은 이쯤 해야겠다며 탁자에 쌓인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하던 대형 사건이 최근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일주일 연속 야근을 해내고 있던 참이었다. 날이 갈수록 짙어지는 스티븐의 다크서클과 퀭한 눈은 라이브라 멤버들의 걱정을 샀다. 가득 쌓인 서류를 처리하는 업무에 적합하지 않은 이들이니 날이 갈수록 안색이 나빠지는 상관을 묵과하기 어려웠으리라. 재프와 레오나르도는 워커홀릭의 경지를 갱신하고 싶은 거냐며 혀를 내둘렀고, 체인과 제드는 그만 쉬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렇다면 직책상 유일하게 스티븐의 위에 있으며, 이곳의 리더인 크라우스의 반응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했다. 야근 3일째부터 지금까지 크라우스는 매일 밤 스티븐과 함께 사무실에 남았다. 길베르트 씨가 말려줄 거라는 기대는 허허 웃을 뿐인 반응과 함께 박살났다. 그렇게 오늘도 종이를 넘기고 펜이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밤이 깊어갈 거라 예상했건만.
“모르는 척은 하지 말아 주었으면 하네만.”
“아니, 잠깐만. 진짜였어? 누구를?”
“스티븐 A. 스타페이즈. 동료이자 친우를, 내가 사랑하고 있단 말일세.”
신성존재급 폭탄선언을 하는 크라우스는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 스티븐은 혼란스러워졌다. 입을 벌렸다 닫기를 반복하던 그가 겨우 꺼낸 것은 다시금 부정하는 물음이었다. 착각이 아니냐고, 우정에 속할 친애를 다른 방향으로 안 것이 아니냐고. 크라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닐까 고민하던 때는 지났다고, 가볍게 품다 꺼낸 고백이 아니라는 남자가 스티븐을 따라 처리하던 서류 뭉치를 치웠다.
종이 특유의 바스락거림조차 사라진 침묵이 곧 둘에게 찾아왔다. 불유쾌한 긴장과 초조가 허공을 수놓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 무언의 줄다리기에서 먼저 손을 놓은 쪽은 예상 외로 크라우스였다. 그는 한숨과 함께 스티븐에게 사과를 건넸다. 같은 성별에게 고백을 받았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싶었던 모양이었다.
“불쾌했다면 미안하네. 우정을 깨고 싶은 의미가 아니었어. 거절해도 앞으로 우리 사이가 변하는 건 없을,”
“어떻게 그럴 거라 자신하지?”
부담을 덜어주려는 크라우스의 첨언은 미처 끝나지도 못한 채 날카로운 질문으로 공격당했다. 내가 알게 되었는데 변하는 게 없을 거라고? 그조차 싫다고 하면? 크라우스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스티븐이 이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사선에 나서 목숨을 건 공방을 벌이는 것에 아무리 익숙해도 어려운 분야는 있는 법,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는 게 무엇이 문제인지 모를 상대를 보며 스티븐은 찰나에 후회했다. 하필이면. 어째서.
그것은 순간이자 오랜 한탄이었다. 거리낌 없이 유혹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이들이라면 좋았을 텐데. 고백을 받아도 가볍게 거절할 수 있는, 혹은 하룻밤 위로로 넘어갈 수 있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면 나았을 터였다. 정보를 대가로 한 애정은 해본 적도 없을 그가 아니라. 이윽고 신중히 말을 고르던 크라우스가 답하기 위해 말문을 텄다. 그는 질문을 무시하거나 거짓을 입에 담는 무뢰배가 아니었으므로. 이 또한 스티븐과 달랐다.
“애정이 통하지 않았다 해서 우리 사이가 끝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내게 스티븐이라는 남자는 그보다 훨씬 소중하니까.”
“그래서 친구로라도 지내겠다고?”
“다시 사과하지. 아마 나는 앞으로도 자네에게 연정을 품을 거고, 미안하게도 온전한 우정을 바치지는 못할 걸세. 그래도, 이마저 내 욕심에 불과하겠지만… 옆에 있고 싶네.”
크라우스는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스티븐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손을 들어 시야를 가리고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크라우스의 뛰어난 청력은 스티븐이 웃음소리와 섞어 뱉은 것을 놓치지 않았다.
“반칙이잖아. 내가, 내가 얼마나 참아왔는데.”
“스티븐?”
스티븐은 얼굴에 덮었던 손을 떼고 크라우스에게 한 걸음 나아갔다. 다가서기 시작하니 코앞까지 가까워지기는 매우 쉬웠다. 지금의 거리를 얼마나 갈망하고 절망했던가. 의자에 앉아 있던 크라우스가 저를 올려다보니, 잘 알고 있다 여겼던 그 얼굴이 새삼스레 보기에 달았다. 불꽃과 피가 섞여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과 우거진 신록을 담은 홍채가 멋지게 어우러진다. 스티븐은 속으로 금발에 푸른 눈에 비견하는 미인의 조합이라 읊조렸다. 그의 안면에 어딘가 금이 간 듯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지금 한 말은, 나를 포기할 수 없다는 거겠지?”
“그렇네.”
“나도, 외면받을까 무서워 말하지 못했던 게 있어.”
하지만 내 것은 자네와는 깊이도, 방식도 다를 거야. 크라우스의 귓가에 스티븐의 낮은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자신이 그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는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그저 소설과 영화에 나올 법한 평온한 애정을 예상했을 상대에게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아무 말 없이 꿀꺽 삼킬 수도 있지만, 여태 인내했던 시간과 쌓아온 경애가 양심을 찔러댔기 때문이었다.
나를 밀쳐내. 그게 너의 유일한 희망이 될 거야. 간절히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는 권유를 하는 스티븐의 얼굴은 지나치게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 크라우스는 자신에게 드리워진 이의 그림자를 받아냈다. 스티븐이 늘 뿌리고 다니던 향수 섞인 체취가 후각을 건드렸다. 익숙한 평온과 함께 박동하는 심장을 자각해버린, 사랑에 빠진 신사는 거부당하길 기다리는 이의 등에 손을 둘렀다.
“자네라면 괜찮으니까.”
“…크라우스.”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네. 크라우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겹의 사슬로 묶여 있던 검은 짐승이 환호했다. 부족한 잠이 배려해 냉정하게 거절해야 한다는 이성을 끊었고, 저열한 욕망을 알렸음에도 닿아준 허락이 마지막 인내를 씹어 먹었다. 스티븐은 그대로 크라우스에게 입을 맞췄다. 이전의 밤이 무너져간다. 시작의 새벽이 성큼 빈 자리를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