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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2D

[캇데쿠] 상실, 그러나

서리달 2016. 6. 10. 15:33

※캇데쿠 전력 60분 주제: 악연

※주제랑 좀 많이 겉돕니다.

※급전개 주의



기억과 감정의 상호작용은 복잡하다. 과거를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의 감정은 과연 어떻게 변화하고 유지될 수 있을까, 언제부턴가 화제가 된 이 의문은 무수한 연구자를 저항할 수 없는 호기심과 사명감의 늪에 밀어 넣었다. 그 여파는 온갖 방향으로,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 없는 쪽으로까지 퍼져버리고 말았다.


“그게 말이 되나요?!”

“안타깝지만, 그렇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순 없는 건가요?”

“개성에 의한 게 아니라니, 또 모르지.”


침울한 열기가 찬 학급에 들어선 아이자와 선생이 몰려드는 질문을 차분히 답해주었다. 아이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정도는 달라도 모두가 심각해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 날 사라졌던 급우가 프로 히어로들에 의해 겨우 구출된 것도 모자라 기억을 잃었다는 게 아닌가. 하물며 얌전하고 조용한 코다라면 모를까, 언제라도 소란스러워질 수 있는 녀석이 당했다니 실감이 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면회는 내일부터 허용된다고 하니, 갈 생각 있으면 참고해라.”


이 말을 끝으로 아이자와는 출석부를 열었다. 펜을 쥔 손은 불린 이름에 응하는 목소리를 따라 출석을 점검해갔다. 그 행동은 요 며칠간 그랬던 것처럼 하나의 빈칸에서 잠시 멈추었다. 아무도 답하지 않는, 훅 가라앉은 침묵을 깨려는 듯이 아이자와는 곧바로 다음 번호의 이름을 불렀다.


“바쿠고 카츠키.”

“….”

“미도리야 이즈쿠.”

“…네.”


아이들의 안색이 조금 더 나빠졌다. 미도리야는 고개를 숙였다. 무릎 위에 놓인, 꽉 쥐어 파르르 떨리는 주먹은 책상 밑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

태어난 이래 줄곧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소꿉친구의 인연은 가끔 일반적인 우정이 허용하는 선을 가볍게 넘곤 했다. 모든 수업이 끝난 시간, 미도리야는 함께 가자는 이이다와 우라라카에게 오늘은 힘들겠다고 사과했다. 따로 일정이 있느냐며 이해해준 둘에게 감사한 미도리야는 제법 급한 걸음으로 교문을 빠져나갔다. 내일 바로 병원으로 가자 의견을 모으던, 바쿠고와 자주 어울리던 몇 명을 뒤로 한 채로.


눈에 익은 교복이 차츰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야 미도리야는 다리의 속도를 줄였다. 핸드폰을 꺼내 단축 번호를 꾹 누르고 통화 대기음을 잠깐 들으니 금방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이즈쿠니?


“엄마, 캇짱이…”

‒소식 들었구나? 정말 다행이지 뭐야.

“선생님이 내일부터 면회 가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렇긴 하지만, 사실 오늘 일손이라도 거들까 했거든. 같이 갈 거니?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지. 너도 많이 걱정했잖아. 집 말고 병원으로 바로 오렴.


짧은 통화는 유익했다. 미도리야는 액정의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바로 발길을 돌렸다. 바쿠고가 입원한 병원이 어딘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면회 금지로 만날 수 없을 때, 몇 번이고 찾아갈까 고민하면서 알아놓은 정보였다. 느긋하게 주변을 살필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가니 도착은 금방이었다. 병원 정문 앞에서 어디로 오라는 문자를 본 미도리야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비상계단을 뛰어올랐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5층의 어느 병실 앞 복도에 서 있는, 두 명의 중년 여성에게 다가갔다. 각각 바쿠고와 저의 어머니였다. 그녀들의 주위로 경찰 제복을 입은 몇 명이 보였다. 아마 납치를 저지른 빌런들에 대한 정보를 듣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곧 인사를 하고는 사라졌다. 셋만이 남자 미도리야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이즈쿠 왔구나.”

“뛰어왔니? 땀 나는 것 봐.”

“괜찮아요. 그보다, 캇짱은요? 괜찮나요?”


글쎄, 아주머니는 말을 흐렸다. 뭉개진 문장의 뒷부분이 풍기는, 뒤섞인 안도와 슬픔을 맡은 미도리야는 재촉할 수 없었다. 그저 답을 이미 들었다는 것처럼 병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냐고 질문을 더할 뿐이었다. 그녀는 기꺼이 허락했다.


“…알고 있지?”


들어가 보라는 말 뒤에 붙은 것은 경고이자 조언이었다. 미도리야는 한발 늦게 이해했다. 학교에서 들었던, 바쿠고의 상태가 떠올랐다. 기억하지 못한다 했었지. 가족과 친구, 모든 관계의 사람들을. 쇳조각을 밀어 넣은 듯이 속이 시리게 무거워졌다. 미도리야는 힘주어 문을 열었다. 망설임을 꾹꾹 지워낼 것처럼.


*

일인실 안은 깔끔했다. 어질러진 것이라곤 덮고 있는 이불에 간 주름 정도일까. 바쿠고는 침대 머리맡에 베개를 대고 반쯤 누운 자세로 미도리야를 맞이했다. 치켜 올라간 눈매에서 살풋 경계심이 엿보였으나, 평소의 불량한 모양새에 비하면 유순하다고 할 만했다. 미도리야는 그 점이 못내 당황스러워 말을 살짝 더듬었다. 그러니까… 캇짱, 안녕?


“다친 데 없어 보여서 다행이야. 난 미도리야 이즈쿠인데,”

“…캇짱?”

“어, 그게, 네 별명인데 이젠 나밖에 안 부른다고 할까. 입에 붙어서!”


보편적인 상식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는지, 어릴 적 애칭에 바쿠고는 탐탁지 않은 티를 냈다. 표정 없던 얼굴에서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 것을 본 미도리야는 속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급히 이유를 덧대었음에도 바쿠고는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라고 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한 미도리야가 마른 침을 연달아 삼키고 난 뒤에야 바쿠고는 이리 오라고 검지를 까딱거렸다. 기르는 개를 부르는 것처럼 간단한 동작에 미도리야는 순응했다. 겨우 그는 침대 근처로 다가설 수 있었다.


“미도리야랬지.”

“응.”

“뭔가 어색한데. 진짜냐?”


과연 바쿠고, 기억이 없어도 뛰어난 감의 소유자였다. 의심 어린 눈길이 쏟아졌으나, 차마 네가 날 등신이라는 뜻의 데쿠라고 불렀다고는 말하기 곤란했던 미도리야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개성에 당한 게 아니라고 들었어. 경찰이 현장에 있던 기계를 분석하면 금방 되돌아올 거야. 다들 널 도와줄 거고. 미도리야의 열변을 바쿠고가 딱 막았다.


“어딜 수작을 부려대.”

“윽.”


바쿠고는 코웃음을 쳤다.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오길 종용하는 모습은 미도리야는 결국 저를 부르는 호칭을 말해줄 수밖에 없었다. 데쿠야. 힘내라는 의미지만 캇짱은 아마 아니었을걸. 이건 익숙했는지 바쿠고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시작으로, 조금씩 저를 믿기 시작했는지 이것저것 물어오는 바쿠고에게 미도리야는 휩쓸렸다. 부지런히 오가는 문답은 발목에 추를 매달고 조용히 익사하는 것처럼 안온한 시간이었다.


“근데 데쿠 너, 나랑 친하냐?”


…문장 하나에 금방 깨져버릴 평화였음에도. 미도리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긴 지금의 바쿠고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가족 말고는 처음으로 병실에 찾아온 데다, 이것저것 그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고 털어놓지 않았나. 미도리야는 어설프게 웃었다. 제법 좋은 시간이었건만, 달갑지 않은 설명으로 망치려니 씁쓸했다.


“음, 우리는… 소꿉친구로 자라긴 했지만 지금 와서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달까. 그냥 데면데면한 클래스메이트에 가까웠거든.”

“그래?”

“응. 가끔 갑자기 캇짱이 화내는 것 말고는 딱히.”

“하, 지랄하네.”


툭 튀어나온 부정에 미도리야는 눈을 크게 떴다. 바쿠고는 어느새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비웃음에 가까운 그것은 예전, 맞서야 할 적에게 보이던 찬란한 호기를 연상시켰다. 뻣뻣하게 굳은 몸에서 불유쾌한 심장박동이 쿵쿵 울렸다. 그런 미도리야를 날카롭게 꿰뚫어보던 바쿠고가 연속으로 공격해왔다. 내가 그깟 예전 일 좀 까먹었다고 아까부터 슬슬 감추는데, 다 보이거든?


“널 딱 보자마자 머리가 아팠지. 망치로 두개골을 쾅쾅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게다가 들어올 때 잔뜩 겁먹은 티나 팍팍 내고 말야. 누가 잡아먹냐?”

“다 합쳐보면, 분명 너랑 난 지독한 악연이었을 거라고.”


미도리야는 입을 다물고 듣기만 했다. 기실 바쿠고가 쏟아낸 매도는 제법 들어맞았다. 아마 둘을 아는 많은 이들도 공감할 터였다. 하지만 그래도, 물론 금방 기억을 찾겠지만, 이번엔 잘 지내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짧게 들었던 희망은 쉽게 꺼졌다. 조금 시무룩해진 미도리야가 적당히 그렇다 말할 타이밍을 노리려 들었을 때, 바쿠고가 말을 덧붙였다.


“…끊어버릴 수도 없었겠지. 뭔가 앞으로도 그럴 것 같잖아. 짜증 나게.”



그 순간을 뭐라고 해야 할까. 분명 아무것도 모를 거면서, 무시할 수 없다 말하는 바쿠고가 미도리야에게 안긴 기쁨을. 동경만 품은 것도, 싫어하기만 한 것도 아닌 그가 제 존재를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려서 그만 설레고 말았다는 걸. 미도리야의 귓가가 확 달아올랐다.


"어… 음… 고마워…?"

"뭐가? 돌았냐?"


바쿠고의 퉁명스러운 태도에도 미도리야는 배시시 웃었다. 기억이 돌아온 뒤에, 다시 한 번 오늘 일을 얘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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