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워치, 대개 레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어린 청년은 자신이 의식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앞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든 어둠 속에서 정교하고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안구가 반짝거렸다. 신들의 의안이라는, 매우 귀중한 취급을 받는 눈이 아직 몽롱한 머릿속과 달리 멋대로 뇌에 정보를 전달하려 했다. 레오는 머리를 흔들어 완전히 정신을 찾았다.
다행히 바로 죽이려던 건 아니었는지 숨 쉬는 것은 자유로웠다. 공기 중에 섞인 텁텁함으로 보아 실내, 그것도 밀폐된 곳인 듯하니 아마 어느 건물의 지하실이 아닐까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레오는 자신의 팔과 다리가 앉혀져 있는 의자에 묶여 있음을 인지했다. 조금이라도 느슨해지지 않을까 몸을 흔들어보려 했지만, 살짝 아플 정도로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조여 맨 로프는 버거운 상대였다.
‘이걸 어쩌지. 도움을 청해야 할 텐데.’
항상 붙어 다니는 친구, 음속 원숭이 소닉이라도 곁에 있다면 구조 신호를 보내기 쉬울 텐데. 그마저 잡힌 것인지 조그맣게 불러 봐도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역시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 대 핀치 아냐 이거? 혹시 라이브라의 일원이라는 게 들킨 건가. 마피아? 테러리스트?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레오의 뇌가 정신없이 돌아갔다.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올 때까지.
“어?”
기름칠이 덜 된 문이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닫히고, 타인의 손으로 등이 켜졌다. 천장에 매달려 달랑거리는 동그란 전구가 물체를 구별할 만큼의 빛을 내며 작게 흔들거렸다. 레오의 앞에 놓인 탁자 너머로 시야에 들어온 인영은 큰 키에 정장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사람 좋게 처진 눈매와 선명한 얼굴 흉터가 낯설지 않았다. 레오는 멍청히 입을 벌린 채 중얼거렸다. …스티븐 씨? 상대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여기가 어딘지 궁금하겠지? 거주민이 다 나간 철거 예정 지역이고, 건물 지하라서 사람들 눈에 띄기까진 시간이 좀 걸려.”
다가와 맞은편 의자에 앉은 스티븐, 레오의 상사가 태연히 물었다. 조금 과격하게 데려와서 미안하군. 여기에 어떻게 온 건지 기억나는 게 있나? 그 말에 레오는 정신이 들기 전을 돌이켰다. 분명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집에 가던 중이었는데. 추가 주문이 밀려서 평소보다 늦게 일이 끝나 걸음을 빨리하던 차에 난데없이, 뒷목에 가해지는 충격과 함께 암전이 찾아왔었다.
“스티븐 씨가 그런 건가요?”
“그렇지. 걱정하진 말게, 곧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지금 그 말을 신뢰할 수 있는 상황이냐는 말이 혀끝에서 아슬아슬하게 대롱거렸다. 레오에게 있어 스티븐이라는 남자는 그저 조금 피로한 기색이 잦고, 효율을 중요시하는 유능한 남자였다. 그리고 어딘가 비밀스러운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 여러 사람의 평가였고 레오 역시 라이브라에 몸담은 시간이 늘어나면서 사람 좋아 보이는 스티븐에게 가끔 의뭉스러운 면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왜 자신이 묶인 채 여기에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스티븐 씨의 일 처리가 이런 방식이었나?
“궁금한 게 있으시면 그냥 물어보셔도 되는데, 혹시 제가 급히 몸을 숨겨야 하는 상황인가요? 눈이 노출되었다던가.”
“아니, 아닐세 소년. 이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용무야.”
스티븐이 레오를 향해 웃어 보였다. 평소와 같은 안색에 아주 약간의 위화감이 섞여 있었다. 잘 빚은 도자기에 그어진 미세한 금과 같은 그것에 레오는 왜인지 오싹 소름이 돋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얼떨떨하게 있자니 스티븐이 주도권을 독차지했다. 우선 말을 들어줬으면 하는데. 대화는 뒤로 밀어도 괜찮겠지. 실은 필요도 없겠지만.
“소년. 레오나르도 워치. 알고 있나? 나는 가끔 자네가 부러웠어.”
“네?”
“지금에 와선 거의 매일 그렇고. 이미 그 눈에 다 보였을지 모르지만 말이야.”
절대 안 보였는데요. 하나도 모르겠습니다만. 레오가 속으로 부정하는 사이에 스티븐의 세월을 담은 긴 손가락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일정한 박자에 맞춰 말을 고르던 입에서 흐리지만 반짝이는 단어가, 문장이 거칠고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소년도 이제 제법 익숙해졌으니 알겠지만, 이곳 헬사렘즈 로트의 라이브라의 구심점은 명실상부 크라우스. V. 라인헤르츠지. 그의 피를 타고 흐르는 능력과 인류를 향한 애정이 토대가 되지 않았다면, 확신하건대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을 거야.”
“동료를 얼마나 위하는지, 아마 우리를 걱정하느라 위에 구멍이 뚫리길 여러 번일걸. 재프 같은 구제불능의 사적인 위기에도 구하러 뛰쳐나가지를 않나. 그런 점에선 타협의 여지라곤 조금도 없다는 게 우려스럽지만, 또 흐뭇하거든.”
“크라우스의 이상은 더없이 높고, 그것을 추구하려면 발밑을 보아선 안 되는 법이지. 물론 그가 흔들리는 바닥을 본다고 무너져내릴 사람은 결코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단단히 받쳐주고 싶달까. 때 묻지 않은 설원을 보존하고 싶은 것과 비슷한 마음으로.”
레오는 밀려오는 찬사의 향연에 잠겨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크라우스에 대해 말하는 스티븐의 얼굴을 대체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죽은 예수의 옷자락을 쥔 신도, 왕의 충신, 혹은 강아지의 재롱을 보는 주인? 여러 이미지가 그에게 겹쳐 씌워지고 벗겨지길 반복했다. 마지막에 탄식처럼 내놓은 단정斷定의 직전까지.
“나는 그런 그를 막지 못해. 언제나 그랬지.”
이제 스티븐은 다리를 꼬고는 깍지를 낀 양손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자세로 인해 바짓단이 올라간 발목이 흔들거리고, 구두 끝을 까딱이는 스티븐의 말은 콧노래를 흥얼거릴 때처럼 운율이 있었다. 유쾌한 어조와는 다른 내용이 부조화를 이루어 레오의 귀에 쿡쿡 박혔다.
“약자에게 약하고 강자에게 강한 고결한, 나의 크라우스. 라이브라의 대다수가 여러 번 그 덕을 봤고 말고. 인류 최강인 그에게는 절대 다수가 보호 대상이겠지만, 아무래도 우선하는 상대적인 척도는 있으니까 말이지. 예를 들어… 나와 소년이 위기에 빠진다면, 크라우스는 우선 소년을 먼저 구해낼 테지. 더 강한 내가 그동안 버텨줄 거라 믿으면서 말이야.”
“나무랄 데 없는 신사이자 기사도의 모범인 그라면 당연한 결정이지. 나 또한 그렇기에 여태 큰 신경을 쓰지 않았어. 그러려고 노력했고.”
분명 그랬는데. 현재가 아닌 과거형으로 끝난 문장과 함께 가늘게 휜 스티븐의 눈이 레오를 꿰뚫었다. 착각에 불과하겠으나 레오는 마주한 그의 시선이 제 목을 꺾어버리고 싶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식은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겨우 침만 꿀꺽 삼켜낸 레오를 배려하지 않은 스티븐은 멈췄던 본론을 마저 이었다.
“처음의 소년은 별다른 문제가 아니었어. 길거리를 빨빨거리다 죽을 어린 동물처럼 그저 약할 뿐이었으니까. 크라우스의 공평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대상.”
“하지만 결국 그 한계를 뛰어넘었지. 당당하게 크라우스의 자랑스러운 동료가 되었지. 라이브라의 일원으로서는 좋은 발전이라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나, 스티븐. A. 스타페이즈라는 한 개인은… 그에게 특별해지는 누군가가 늘어나는 게 달갑지 않아서.”
이미 소년은 자격을 갖추었으니 이래 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겠지. 하지만 내 공연한 화풀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끔 견딜 수가 없어서… 추하게 발버둥 치고 있는 거야. 부끄럽게도. 창피해 볼을 붉힐 것처럼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은 남자의 경고는 날카로웠다. 레오는 스티븐의 자조와, 오직 한 명을 향해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감정이 풍기는 향을 맡았다. 시체와 꽃이 엉킨 듯한 냄새가 지독했다. 코를 막고 싶다는 레오의 바람을 알아챈 걸까, 스티븐이 마무리를 알리려는 것처럼 박수를 짝 쳤다. 하나의 첨언과 함께.
“혹시 지금의 시간이 크라우스에게 비밀이면 좋겠다는 건, 곤란한가?”
“…아뇨. 입 다물게요.”
“고마운걸.”
들어줘서 고생했다고, 조금은 속이 시원해졌다는 스티븐은 레오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트랩은 없으니 계단을 타고 죽 올라가면 된다고 문을 가리키는 스티븐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있었다. 레오는 애써 외면하고는 도망치듯 걸음을 서둘렀다. 제법 오래 묶여 있어 피가 통하지 않는 다리가 비틀거렸다.
저려오는 손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힘껏 뛰다시피 해서 나온 건물 밖은 안개의 흔적이 곳곳을 덮은, 잘못 봉합한 상처의 고통처럼 요동치는 헬사렘즈 로트 그대로였다. 인적이 드물 뿐이지 자신이 알던 도시라고 단번에 말할 수 있는.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럴 터인.
그런데 왜 이리 입맛이 쓴 거지. 안타까움과 답답함, 거부감과 이해가 뒤섞여 꽉 차오른 속을 레오는 저절로 나오는 한숨으로 덜어냈다. 질투라는 검은 가시에 찔려 썩어가는 심장을 비우지도 버리지도 못하고, 겨우 이런 방식으로나마 숨통을 트는 남자는 언제 올라오는 것일까. 크라우스는 결코 모를, 스티븐 자신을 빼닮은 지하에서. 레오는 건물에서 멀어지던 도중에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입을 벌린 심연은 그저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