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해진 하늘 아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일렬로 세워진 가로등 불빛을 보며 옥윤은 걸었다. 하늘 너머의 별보다 가깝고 그보다 싸늘한 빛이 집으로 가는 이정표 역할을 했다. 밤늦게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돌아오니 이런 밤길이 되려 친숙해질 지경이었다.
쌍둥이 언니 화윤은 자신처럼 안전하고 편하게 집에서 하라 말렸으나 옥윤은 이게 편했다. 집과 독서실이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고, 제법 호신술도 배워 두었으니 문제 될 것은 없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내년이면 드디어 악몽 같다던 고등학교 삼학년인지라 더욱 학업에 집중해야 했다.
“어이.”
“…?”
“옥윤이 이제 왔냐?”
그 집중을 방해하는 요인이 하나 생긴 것만 빼면, 옥윤의 계획과 실천은 나름 완벽하다 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이사를 온 옥윤의 옆집은 부유했다. 그들이 깔끔하게 리모델링하고 살림을 들여놓는 동안, 돈만 많은 게 아니라 족보도 있는 집안이라며 그새 동네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다. 그 덕에 경쟁심을 자극받은 옥윤의 부친이 한동안 사업을 확장하니 마니로 모친과 말싸움이 난 터라 옥윤은 그다지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더란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녀에게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여태 나와 계신 건가요?”
“어휴, 말도 마라. 직접 너 마중 나오신다는 걸 겨우 말린 게 이거야.”
말로만 듣던 집사, 혹은 관리인―영감이라 불리는―까지 있는 옆집 가족은 부부와 외동아들로 단출한 구성이었다. 아들이 아직 초등학교 졸업도 안 한 나이랬던가. 옥윤과 비슷한 연령대였으면 분명 멋대로 비교를 당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한 옥윤은 엄마 손을 꼭 잡고 온 아이를 향해 다리를 굽혀 눈을 마주했었다. 안녕, 잘 지내보자. 이름이 뭐니?
이런 별것 없는 인사가 다인, 첫 만남.
“어차피 잠들었을 텐데, 그냥 들어가시지.”
“아니다. 다음날 집안사람들 여럿한테 확인하고 다니실 게 뻔하니… 너도 말 좀 잘해다오. 응?”
“네. 알겠어요.”
정말 의례적인 인사였을 뿐인데, 제 이름이 하 건이라 어물거린 아이는 얼굴이 확 붉어지더니 반했다 소리치고는 줄곧 옥윤을 쫓아다녔다. 주말이면 초인종을 눌러 옥윤이 누나 있냐며 찾아대고, 제 학교에서 유행할 법한 선물을 주며 결혼하자 칭얼대었다.
본인 혼자서만 그러면 다행이지, 관리인 영감님까지 부려 먹는 꼬마를 어찌해야 할지 옥윤은 감이 오지 않았다. 어린 도련님의 첫사랑에 혹사당해야 하느냐고 한탄하는 영감님과 나름의 친분을 쌓게 된 것이 그나마 수확일까.
“너도 공부한다고 너무 늦게 다니지 말고. 요즘 세상이 원체 흉흉하다더라.”
“걱정하실 필요 없는 거 아시면서. 이만 들어가세요.”
“오오냐.”
영감님은 밤공기가 차다며 부러 어깨를 들썩이고는 먼저 들어갔다. 옥윤은 고개 숙여 인사한 뒤 마찬가지로 제집 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삑거리는 소리에 이어 걸쇠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등에 진 책가방 아래로 팔랑거리는 교복 치마가 문이 닫히는 것과 동시에 가려졌다.
*
하늘은 물감을 바른 것처럼 파랗고, 드문드문 박힌 구름은 잡티 하나 없는 순백이었다. 이 좋은 날씨에 옆집 정원에 마련된 테이블 의자에 앉은 옥윤은 떨떠름한 얼굴로 영감님의 수다를 들어주고 있었다. 비록 어느 정도 친해졌다고는 하나 저를 붙들고 다다다 말을 쏟아내는 상대에게 마땅히 일하는 시간일 텐데 임무 태만이라 타박한 만도 하건만, 그녀는 그리 할 수 없었다.
“우리 도련님이 글쎄, 친구와 주먹다짐을 하셨다니! 사내대장부가 싸움 좀 하는 거야 내가 입 대고 자실 바 아니지만! 그래도!”
“아….”
“그게 옥윤이 너 때문이라니, 대체 왜지?”
그 원인 중 옥윤 자신이 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옥윤은 절로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글쎄요. 대체 왜인가요.
“영감! 누나한테 뭐라 하지 말랬지!”
“어이코!”
“하 건. 나이 드신 분께 무슨 말버릇이야.”
아무리 자기네 고용된 사람이라지만 연장자에게 반말이라니. 엄한 얼굴의 옥윤은 대화에 막 끼어든 아이, 하 건을 타박했다. 건은 들켰다며 옥윤의 옆에서 부러 딴청을 부리는 영감을 노려보더니 곧 잘못했다 말했다.
입을 부루퉁하게 내민 건의 얼굴, 특히 볼이 조금 부어 있는 것을 바라본 옥윤은 조금 들어차 있던 짜증을 가라앉혔다. 이래 봤자 조금 있으면 또 버릇없게 굴 거라 예상하면서도,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나 때문에 싸웠다던데, 정말이니?
“그게, 그 녀석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막…”
“?”
“누나가, 아줌마라고… 아줌마 아냐! 누난 정말 예쁘니까!”
옥윤은 잠시 방금 들은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러니까, 친구가 옥윤의 험담을 했다고 나섰다는 말인가? 대체 평소에 건이 얼마나 자기 얘기를 하고 다녔길래? 그런 생각을 하는 옥윤에게 그래서 제가 먼저 선빵을 날렸다 해명하는 아이는 열심이었다. 빤히 건을 바라보던 옥윤은 손을 뻗어 힘이 들어간 아이의 주먹을 풀어주고, 머리를 토닥였다. 어색한 손길은 칭찬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당황한 표정을 한 건을 보며 옥윤은 입을 열었다.
“잘했어.”
“어…?”
“다음부턴 들키지 않게 해.”
알겠지? 그 말을 끝으로 옥윤은 이만 공부하러 가야겠다며 영감에게 인사했다. 둘을 뒤로하고 짐을 가지러 가는 그녀의 등 너머로 영감과 건의 호들갑이 들렸다.
“영감, 봤어? 들었어?”
“자, 도련님 진정하시고…”
“역시 누난 최고야!”
옥윤은 보이지 않게 픽 웃음을 흘렸다. 성가신 옆집 꼬마는 가끔씩 귀엽곤 했다.
*
“소식 들었어?”
“무슨?”
“옆집의 건방진 남자애 말야.”
“건이가?”
“응. 건인지 군인지, 여하튼 걔가 크게 혼났다던데.”
노크도 없이 휙 옥윤의 방 안으로 들어온 화윤은 상대의 덤덤한 얼굴을 보며 깔깔거렸다. 그럼 그렇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표정을 한 옥윤은 마저 출근 준비를 하더니 화윤이 지루해질 즈음에 슬쩍 이유도 아냐고 물어왔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며 다시금 웃은 화윤은 중요한 대사를 외치기 직전의 배우처럼 잠시 뜸을 들이더니, 비밀을 고하듯 알려주었다.
“이번 시험을 홀딱 말아먹었다지 뭐야. 내신에 영향이 컸는지, 걔 아버지가 단단히 뿔이 나셨대.”
“흐음. 그래서?”
“듣자 하니 방학 동안 어디 기숙학원에 박혀 있으라더라. 이제 너 쫓아다니지도 못하게 되었지 뭐니.”
여고생과 초등학생 시절부터 지금, 어엿한 회사원과 남고생이 될 때까지 건이 옥윤바라기 노릇을 했다는 건 유명했다. 온 동네뿐만 아니라 학교까지 그러는 바람에 회사까지 말이 나오지 않게 옥윤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다 끌어모아 열심히도 민폐를 끼치더니만, 기어코 이 사달이 날 줄이야. 옥윤은 짓궂은 미소를 짓는 화윤의 볼을 쿡 찔렀다.
“어머.”
“재밌다는 얼굴이네.”
“아니, 정말 웃기잖아. 코흘리개 꼬마가 여태 포기 못 한 것도 그렇고, 지금쯤 풀죽어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이 된 기분일 것도.”
그러니 가서 위로 좀 해주지그래? 화윤의 마지막 말에 옥윤은 그게 목적이었냐고 핀잔을 주며 화장을 마무리했다. 과하지 않게, 그러나 신경을 쓴 티가 나도록. 입술이 산호 빛깔로 물든 옥윤이 시계를 보았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지각이겠군.
“퇴근하고 나서.”
“지금 아니고? 나 오늘 약속 있어서 늦는데, 구경하지 못한다니 아쉬워서 어째?”
“장난치지 말고.”
알았어, 기집애야. 옥윤의 어깨를 토닥인 화윤은 회사 잘 다녀오라 말하며 방을 나가버렸다. 그 뒤 옥윤은 필요한 걸 다 챙겼는지 확인하고는 집을 나섰다. 출근길 내내 그녀의 손은 저도 모르게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
오늘은 야근이 없을 것 같다는 계산에 안심하기도 잠시, 입사 2년 차 회사원이 갑자기 잡힌 회식을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옥윤은 화윤에게 문자로 도움을 청한 뒤 갑자기 온 전화를 받았다. 사무실에서 그대로 받은 전화 너머, 모친이 병원에 입원하셨다며 오열하는 자매의 실감 나는 연기는 통화 당사자 주변에까지 매우 잘 울렸다.
그 덕에 어서 가보라는 배웅과 함께 일찍 퇴근하게 된 옥윤은 화윤이 연예계에 진출했으면 대성했을 거라 생각하며 건에게 연락했다. 굳이 저장할 필요가 없이 외우고 있는 번호를 누르고, 잠시간의 대기음을 거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건아.
―먼저 전화하다니 진짜 놀랍다. 무슨 일 있어?
―…나 퇴근하는 길인데, 이따 만날 시간 되니?
―없어도 만들어야지! 지금 어디야? 마중 나갈까?
한껏 들뜬 기분을 숨기지 않는 건의 목소리가 어느새 이렇게 낮아진 걸까. 변성기가 왔을 무렵 저를 부르지도 못하고 멀리서 따라오기만 하던 아이가 떠오른 옥윤은 추억에 젖었다. 그녀가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의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일 때까지.
"추운데 어디 들어가 있지 그랬어."
"이 정도 쌀쌀한 건 전혀 문제없잖아. 나 다 컸다고."
옥윤은 누나 키도 넘은 지 오래라며 옆에 붙어오는 건을 말리지 않았다. 키만 컸으랴, 넓어진 어깨와 각진 이목구비에 그녀는 눈길을 빼앗겼다. 흘러간 시간이 얼마나 오래 쌓였는지 옥윤은 새삼 실감했다. 그래, 너는 자랐구나.
"건아."
"응?"
"기숙학원 가게 되었다며."
"벌써 알았어? 거 참, 누구 입이 그렇게 가벼운 건지… 방학은 금방 지나가니까, 대충 때우고 돌아올 거야. 그동안 나 잊지 말고,"
"그러지 마."
옥윤은 쐐기를 박았다. 방학 지나서도 계속 철없이 굴 거면, 너 볼 생각 없어. 건은 굳었다. 걸음을 멈추고 옥윤을 붙들었다. 어깨에 닿은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게 그대로 느껴져 옥윤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르는 것처럼 입맛을 다셨고, 끝내 하나밖에 묻지 못했다.
"누난, 내가 이러는 게 어려서 그런 것 같아?"
"……."
"진심이라고 느낀 적은 있어? 그냥 어린애 고집이라 생각해?"
"건아."
"대답해."
옥윤은 건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눈이 타올랐다. 옥윤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눈꺼풀을 닫았지만, 곧 제 턱을 들어 올리는 건의 손길에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선 이의 정열은 모든 것을 억누르는 것에 익숙한 그녀에게 지나치게 뜨거웠다. 입에서 숨과 뿌연 김이 섞여 나오는 계절임에도, 둘은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지금은 그래. 어딜 봐서 어리광이 아니라 하겠어."
"그렇단, 말이지."
한숨과 함께 나온 옥윤의 답에 건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낙담에 그녀 또한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어언 육 년이 넘게 알아온 이웃은 이제 제 삶의 일부였다. 함께 보내지 않은 시간을 기억하는 게 힘들 정도로, 건은 제 옆에 있었다. 앞으로 멀어질 거라고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익숙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래서일까.
"네가 나랑 같은 대학에 붙으면, 그때는… 진지하게 고려할게."
"…정말로?"
"그래."
옥윤은 조건을 달아 기약하고야 말았다. 지금은 거절하되 나중은 어찌 될지 모른다 미루었다. 그때 가서 받아준다는 것도 아닌, 비겁한 지연遲延에도 건은 좋다 했다. 옥윤을 멋대로 꼭 끌어안고 귓가에 이것저것 속삭였다. 숨결이 귀에 닿자 오싹하고 간지러워 옥윤은 어깨를 움츠렸다. 건은 몇 분간 그러고 있더니, 아쉬운 듯 몸을 떼었다. 옥윤은 노골적으로 티 내지 말라 해주려다 꾹 참았다.
"기다려줘."
이리 말하며 웃는 건에게 잔소리가 더 통할 리 없을 테니까. 힘내보라는 한 마디만 겨우 꺼낸 옥윤은 그녀의 볼이 달아오른 것이 날씨 때문이라 여기고 싶었다. 벌써 마음이 넘어갔다 하기엔 면구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