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떠나 멀리 만주 땅에 자리 잡은 신세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미는 척박한 그곳에서 힘겹게 저를 키우며 가끔
고운 옷 한 벌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 속삭이곤 했다. 어렸던 아이는 그런 어미에게 엄마 하나면 충분하다며 고픈 배에서 울리는
소리를 부러 웃음소리로 가렸다. 품을 파고들면 거칠어진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녀를, 온기를 나는 아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1.
톡.
톡. 톡. 가볍게 세 번, 노크라고 하는 행위는 방 안에 있는 사람을 존중하고 있었다. 굳어 속에 맺힌 과거의 상념에서 깨어난
옥윤은 천천히 일어섰다. 문에 다가가면서 손에 무언가를 쥐고 발소리를 죽이는 것은 그간의 삶이 새겨놓은 부산물이다. 끼익,
기름칠이 덜 되어 거슬리는 소리와 함께 조금 열린 문 너머의 사람을 보며 옥윤은 어깨의 힘을 뺐다. 상대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꼭 뭐가 있어야 얼굴 보는 건 아니지. 용건이 있기야 하지만.”
옥윤은 어깨를 으쓱이며 방으로 들어온 사내의 이름을 몰랐다. 하와이 피스톨, 그는 돈으로 생명의 가치를 잴 수 있게 해주는 직업을
가지고 그리 불렸다. 옥윤이 제 이름 석 자를 알려준 뒤로도 사내는 기어코 본명을 알려주지 않았다. 섭섭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끈한 철판을 쓴 듯한 태연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미묘한 동요를 맛보게 되곤 했다. 고요한 호수에 물 한 방울이 떨어져
만드는 떨림과도 같은 그것이 옥윤은 낯설었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그게 말이지… 지금 시간 되나?”
답지 않게 시선을 여기저기에 두더니 같이 나가자는 그를 보는 옥윤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러더니, 사내는
사람의 예상을 뒤집어 버리는 특기를 가진 모양이었다. 옥윤은 침착하게 질문했다. 부정적인 예상으로 굳은 어조였다.
“들켰어? 일본?”
“아니.”
“그럼 독립군?”
“아니.”
“…그쪽의 의뢰 관련인가?
“아니, 아니. 아—니야. 그냥 좀, 바람 쐬자는 거라고.”
단호하게 끊어낸 사내가 마른세수를 해댔다. 갈 길이 멀구만. 작게 중얼거리더니 갈 거냐고 다시 물어왔다. 목적 없는 권유에 옥윤은
눈을 깜빡였다. 자신이 몸담은 곳도, 사내의 일에 관련된 경우도 아니라니 드문 일이었다. 도톰하니 색 고운 입술이 잠시 달싹이다 동의를
전했다. 그녀의 승낙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모자를 고쳐 쓰며 몸을 반쯤 돌려 나가려다, 고개만 슬쩍
돌려 옥윤을 향했다.
“우리 둘만 간다.”
문이 닫혔다.
2.
여관은 2층에 침실, 1층에 식당과 카페를 겸한 구조였다. 도자기가 달각이는 소리와 사람들이 조곤조곤 나누는 대화가 자욱했다.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사내를 보는 이의 눈초리는 근처에 즐비한, 줄지어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보다 더 끈질긴 면이 있었다. 사내는
조금 질린 얼굴로 영감의 불만을 듣다 중간중간 반박했다.
“장가가실 때가 되었다 했을 때 별말 없더니만, 대놓고 꼬시는 것 좀 보라지.”
“영감, 뭐가 그리 불만이야. 의뢰 실패한 게 아직도 거슬려?”
“삼천불 안 받는 걸로 끝나지 않았잖습니까. 기어코 상해까지 와서 만나려고, 하이고!”
“기다렸을 게 분명하잖아. 그래서지.”
“우리 도련님, 그러다 간도 쓸개도 다‒ 바치고 나중에 우셔도 모릅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던 옥윤에게는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말을 잇는 둘이 친근해 보였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하고 서로를
믿는, 동지나 친구보다는… 가족 같은. 거기까지 생각한 옥윤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제 가족은 없었다. 유모였다던
만주의 어미는 이미 흙 속에서 흔적도 없을 것이요, 언니와 아비는 살아 있는지도 모르다 결국 숨을 거뒀다. 화약내와
총소리가 그들을 추모할 뿐이었다. 직접 죽이지 않았더라도, 자신과 관련이 없다고는 못하리라.
그리고 이제는 죽은 이를 뒤집어쓰고 있기까지 했다. 상해로 와 사내를 기다리는 동안 누구보다 안전하게 보호받았음은 옥윤이 쌍둥이 언니, 미츠코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비의 재산을 물려받은 비운의 외동딸이 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내와 재회하고, 그의 부상이 나을 때까지 몇
번이고 경성과 상해를 오가는 동안 옥윤은 사내의 얼굴을 알 법한 이들은 동행시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금이다. 의심받거나 쫓기지 않는.
옥윤은 다시금 떠오르는 지난날을 가라앉힌 뒤, 또각이는 구두 소리를 감추지 않고 그들에게 걸어갔다. 딱 부잣집 따님 그대로라며 평하는 영감의 어깨를 툭툭 치고 일어선
사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옥윤은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장갑 너머의 체온이 닿았다는 착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잡아 쥐며, 사내는 헛기침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