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유달리 쓴 맛이 나는, 식지 않아 김이 피어나는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설탕이나 시럽을 넣지 않은 순수는 평소 그가 만족하던 것이었으나, 오늘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방 안에는 고전적인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열정을 쏟아 부은 연주가 최고급 스피커를 통해 손실 없이 장소를 채우는 것을 들으며 해리 하트는 책상 위에 내려놓은 잔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그 손길은 책상 위를 쓰는 것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상체 셔츠 단추를 촉감으로 인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어느덧 절정에 이른 음악이 발끝을 타고 온몸을 휘감았다. 해리는 눈을 감고, 자신을 감싸 안은 무형의 족쇄가 꽃을 피우기를 기다렸다. 많은 이들이 그것을 음악을 즐기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해리 또한 그랬다. 그럼에도, 가장 아끼는 연주였음에도 그는 실패했다. 음표를 따라 노니는 축복은 해리를 사로잡지 못했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헐떡였다. 구멍이 뚫린 채 늙은 개의 호흡처럼 불규칙한 고통을 뱉어내고 있었다. 드높은 자존심, 고귀한 혈통, 정도를 모르는 부유함 그 모든 것을 헛되게 만드는 허무 속에서 남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
해리는 언제나처럼 맞춤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었다. 지난밤이 그에게 어떤 흔적을 남겨놓지 못했다는 것처럼 한결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손에 들린 꽃다발 정도였다. 푸른 시네라리아와 아네모네, 중앙에 위치한 흰 장미 한 송이가 눈에 띄었다. 깔끔하지만 묘하게 전문적이지 않은 그것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잡은 해리는 차에 탔다. 행선지를 묻는 기사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병원이었다.
서늘하고 알싸한 병원 특유의 냄새, 수런거리는 사람들의 소음에 남자의 구두소리는 조용히 묻혔다. 그는 익숙하게 건물 깊숙이 자리한 병실의 문을 노크했다. 잠시 기다린 뒤,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 한 사람이 있었다.
정확히는, 해리의 눈에 오직 한 명만이 들어왔다. 돌보던 간병인이 다가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그의 시선은 고정되어 있다. 잠시 그대로 있다, 애써 눈길을 돌려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하니 이해한다는 눈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녀는 미동 없이, 언제나 그대로라는 상태를 정리해 말해주고는 나가버렸다.
이제 그곳에 남은 사람은 단 둘이었다. 해리는 걸음을 옮겨 침대 옆에 섰다.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는 청년은 젊고 어렸다. 손을 뻗어 더티 블론드의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처음 그가 이곳에 올 때보다 긴 감이 있었다.
그날은, 달갑지 않아도 선명할 수밖에 없었다. 해리는 굳어지려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침대 옆 탁자에 가져온 꽃다발을 놓았다. 바로 옆에 놓인 화병에 든 꽃은 보기 좋게 꽂혀 있었으나, 점차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고용인이 늘 그렇듯 가져온 꽃으로 갈아줄 것이다. 해리는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마른 손목을 쥐어보자 가늘게 뛰는 맥박이 안도와 불안을 엉키게 만들었다. 해리는 청년의 손을 제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고해하듯, 낮게 속삭였다.
“…에그시.” 청년의 이름이었다.
*
원망을 담아 젖은 눈빛, 더 쏟아낼 수 있는 독기을 애써 막아내려 꼭 다문 입술, 눈물길이 그대로 남은 채 분노로 발갛게 달아오른 볼. 해리는 그 모든 것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애정을 품는다는 것은 곧 상대의 고통과 슬픔이 자신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과 같다. 내가 괴롭지 않다면 네가 행복해지는 것이 이리 간절할 리가 없을 터였다.
그런 이기심으로, 해리 하트는 진실을 포장했다. 악취가 배어나오지 않게 단단히 눌러 담고, 겉을 곱게 꾸며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 속였다. 살아갈 날이 멀고 먼 젊음을 위해서라는 자기변명에 그대로 넘어갔다.
그렇다. 첫 만남에 눈이 갔다. 감사의 뜻을 담은 초대에 응해 갔던 집에서 발견한, 호기심을 담아 깜빡이던 순수한 녹빛. 아이다운 걸음으로 아장아장 다가와 제 바짓자락을 붙들던 작은 손. 그리 재촉을 받으면서도 혼인하지 않아 더욱 낯설게 느껴질 어린 존재에게 해리는 시간을 내어주었다. 어색하게 무릎에 올려 앉혀 놀아주고, 아이의 종잡을 수 없고 변덕스러운 수다에 어울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인내한다 여기지 않았다. 자신이 추천한 후보자이자 아이의 아비가 미안해하며 아이를 데려갈 때, 사라진 보드라운 온기가 조금 아쉬워질 만큼. 해리는 귀가하는 내내 서늘함을 느꼈다. 겉이 아닌 속 깊숙한 어딘가가 빈 것 같았다.
다음은 많은 시간이 지난 뒤였다. 아마 상대는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을 것이고, 실제로 그랬다. 그러나 해리는 알았다. 죄책감이 없었다면 보다 덜했겠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결국 그대로 흘렀을 것이다. 마주칠 일 없이 평행선을 달리던 삶에도 해리는 에그시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들여다보았다. 대개는 딱딱한 활자가 박힌 보고서였고, 때로는 사진 몇 장이 첨부되었다. 글자를 눈에 담고, 사진 속에서 점차 커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해리는 희미하게 웃곤 했다. 그 시간만큼은 피를 타고 흐르는 한기가 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이대로면 되었다 여겼다. 불행한 사건, 미망인의 오열과 건네진 메달 이후로 아이는 거칠고 무례한 환경에 조금씩 말라갔다. 아이는 도움을 필요로 했으나 정해진 규칙이 그를 막았다. 직접 요청할 때까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지켜보는 동안 알 수 없는 갈증이 심해졌고, 해리는 메달에 새겨진 번호를 되새기곤 했다. 언제일까.
브로그 아닌 옥스퍼드. 마침내 에그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뱉은 한 마디로 거짓이 심어졌다. 해리는 에그시의 곤경을 다른 사람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그가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많았다. 신용할 만큼 입이 무거운 이들도 충분했다. 그러나 해리는 직접 모습을 드러냈고, 이름을 알려주었다. 왜 나를 도와주었냐는 당연한 의구심에 이유를 붙였다.
네 아버지가 내 목숨을 구했다.
그 한 마디에 에그시는 뿌듯해했다. 자랑스러워하는 미소가 피었다. 해리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는 마땅히 더 말해야 할 것이 있었다. 그러나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너무나 보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환한 웃음에 욕심이 일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해리는 잃고 싶지 않다 생각했다.
자격이 없다는 것을 무시한 채, 네가 웃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곧 빚을 갚는 것이라는 핑계를 대며 해리는 에그시의 삶에 끼어들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고, 마침내 감정을 엮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성을 쌓고 그 안에 안주했다. 에그시는 부성애에 불과하다는 그의 얄팍한 변명에 납득할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고개를 젓고, 해리를 보며 말했다.
“누구도 아들을 그렇게 보지 않아요. 당신이 나를 볼 때면, 홀딱 발가벗겨진 기분이라고요.”
남자는 더 자세히 설명하려는 발칙함을 키스로 막았다. 입맞춤 중간중간 소리 내어 웃어버린 청년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다 느꼈다. 존경과 애정이 담긴 눈을 볼 때면 해리는 지금껏 해본 적 없던 영원을 바랐다. 당신을 어머니께 당장 소개할 수 없는 게 미안하고 안타깝다고, 입을 내민 어린 연인의 벗은 어깨에 난 잇자국을 매만지며 시간은 충분하다 달래곤 했다. 유리로 된 성이 반짝거렸다. 붉은 장미가 섬세하게 조각되어 아름답고, 깨지기 쉬운.
*
지나치게 다디단 추억에 시간을 잊었던 해리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에그시의 손을 잡은 채였다. 산산이 부서져 점멸하는, 찢긴 꽃잎과 가시가 새겨진 날카로운 유리조각들이 해리가 숨을 쉼에 따라 심장 안을 휘저었다. 생채기를 내고 때로는 단단히 박혀 파고드는 그것들을 어찌해야 할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시작을 말았어야 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써 붙들고 있던 상대의 체온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돌아갈 채비는 금방이었다. 해리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깨어나지 않는 에그시를 눈에 담았다. 아마 자신은 다시 이곳에 찾아올 것이다. 직접 만든 꽃다발을 들고, 간병인을 내보내고, 기적을 원하는 것을 반복할 테지.
제 아비가 자발적으로 숭고한 희생에 몸을 바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에그시가 울며 쏘아붙인 단어 하나하나가 시렸다. 에그시가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밖으로 뛰쳐나가고, 예상치 못한 사고에 휘말린 것을 막지 못한 해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다. 채워졌던 공허에 시달리며 자비를 구걸하는 오랜 기다림.
아니, 아니다. 해리는 쓰게 웃었다.
채워진 적은 없었다. 그저 그랬다고 착각한 것에 불과했다. 얻지 못한 것을 잃을 수도, 상실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는 법이다. 애초에 모든 것을 말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터였다. 손에 쥔 것은 허상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