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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정발 네타 내용이 들어갑니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마치고 카게야마 토비오는 2학년이 되었다. 배구를 제외하곤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유급하지 않은 게 용하다 해도 어디까지나 진급은 진급. 그것은 즉 새로 맞이하게 된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모처럼 방과 후 배구부로 가는 시간이 맞은 카게야마, 히나타, 츠키시마 셋은 가볍게 담소를 나눴다.
“드디어 나도 선배라고 불리는구나!”
“1학년한테 동급생이라고 착각 당하지나 말라고.”
"이게 진짜!"
“착각하건 말건 간에, 부디 빠릿빠릿한 신입이 들어와야 할 텐데. 농땡이 부리다간 제왕님이 냉큼 내쫓을지도 모르잖아?”
“우와, 엄청 가능한 미래잖아 그거!”
눈을 빛내는 히나타와 빈정대는 츠키시마에게 바로 그러진 않을 거라며 항변하던 카게야마는 문득 자신의 져지 주머니에서 울린 진동에 걸음이 멎었다. 꺼낸 스마트폰 액정에 뜬 메시지를 보는 몇 초가 지나자, 따라서 발을 멈췄던 히나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게야마? 왜 웃어?”
“아무것도.”
살짝 지었던 미소를 지운 카게야마는 빠르게 답장을 보내고 도로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뭐라 더 물어볼 겨를도 없이, 부 활동에 늦지 않게 가자며 달려나가는 그는 익숙한 배구 바보 그대로처럼 보였다. 갑자기 일방적으로 스타트를 끊은 승부에 지지 않겠다며 추격하는 히나타를 먼저 보낸 츠키시마는 걸음에 변화가 없었다. 대신 그는 카게야마보다 10cm 가까이 큰 키 덕분에 놓치지 않았던, 화면에 드러난 메시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토비오 군, 올해도 잘 부탁해.]
[저도요.]
저희의 선배들 중 하나와 했다기엔, 어째 어색하지 않은가.
*
강호였던 시절도 예전이라던 자조는 더는 카라스노에 어울리지 않았다. 화려한 비상에 성공한 까마귀의 업적은 신입생들에게 어필할 거리가 차고 넘쳤다. 덕분에 들어오려는 이가 없다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게 된 배구부는 긴장한 얼굴로 차렷 자세를 한 새로운 피를 수혈했다. 그들 중 몇몇은 이전부터 여기에 관심이 있었는지, 선배들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저, 선배님!”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부에 섞여든 신입들은 자기가 히나타가 경기하는 걸 보고 부에 들어오게 되었다느니, 카게야마가 청소년 국가 대표 후보로 뽑혔다고 들었다느니 말을 붙여보고자 애썼다. 히나타야 금세 흥분해 같이 떠들었지만 카게야마는 선뜻 파트너를 따라 하지 못했다. 자신이 여전히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약하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그나마 이런 자각 끝에 말을 자제하게 된 게 장족의 발전이라 해야 하리라.
“카게야마 선배님은 동경하는 세터가 있으세요?”
허나 전화위복이라 해야 할까, 사담에 있어 말을 아낀 덕분에 카게야마는 갑작스레 속을 찌르는 질문에 뜸을 들여도 어색해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갑자기 대화의 흐름이 끊기는 것보단 이미지를 덜 망친 카게야마가 곰곰이 생각에 빠지자 냉큼 히나타가 답할 타이밍을 가로챘다.
“역시 카게야마가 무서워하는 건 대왕님이지!”
“야!”
“왜? 아니면 누구 다른 사람 앞에서 우물쭈물 한 적 있어?”
욱한 카게야마는 잠시 입을 다물었고, 히나타는 그것 보라는 듯이 웃었다. 하지만 그 뒤 뚱해진 카게야마의 반문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있다면 어쩔 건데.”
“그럴 줄 알았, 아니, 뭐?”
“당연히 없다고 할 줄 알았는데!”
경악한 사람은 히나타만이 아니었다. 놀라워하다 못해 그게 대체 누구냐고 부원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가벼운 소란 끝에, 카게야마의 입에서 미야 아츠무라는 이름이 끌려 나왔다. 작년 전국대회를 기억하는 이들에게서 저절로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여러모로 강렬한 인상을 준 선수였으니, 기억에 남지 않는 게 무리였다.
“하긴 엄청나게 강했지. 올해 3학년이랬나?”
“얼굴 잘생겨, 팬클럽 있어, 게다가 카게야마랑 같은 청소년 국가 대표 합숙 멤버였잖아.”
“그 뒤로도 둘이 계속 교류하는 것 같은데요.”
“엥? 츠키시마, 뭐 아는 거라도 있어?”
사람들의 눈길의 방향이 자신에게 틀어지자, 츠키시마는 담담하게 조금 전에 목격했던 것을 설명했다. 아까 체육관 오면서 제왕님이 본 메시지, 그 사람 같던데. 맞다고 고개를 끄덕인 카게야마는 약간 더 사정을 덧붙였다. 합숙 뒤로 쭉 안부를 묻거나 하면서 연락을 해줬어. 세터 역할에 대해 통화할 때도 있고.
"안 그래도 요즘 자주 통화를 한다 싶더니, 교우 관계를 넓히고 있었구나?"
이 역시 배구에 관한 인연이었으나 카게야마를 아는 사람들에겐 감개무량하게만 여겨졌다. 친구도 잘 만들지 못하던 애가 다른 학교, 그것도 연상과 제법 사사로운 교분을 가지고 있다니 당연했다. 잘 했다며 휘파람을 불려다 만 타나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더 동경하는 건 어느 쪽인데?”
“예?”
“아니, 뭔가 여러모로 오이카와랑 비슷하지 않아? 과연 누가 더 신경 쓰일까 궁금하잖냐.”
“그거야, 저는,”
별 생각 없이 답하려던 카게야마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눈을 깜빡이다가, 입을 벌렸다 닫아버린 카게야마를 타나카가 재촉했다.
“카게야마?”
“어… 모르겠어요.”
머리 위에 동동 물음표가 뜰 것만 같은 맹한 표정으로 카게야마는 끝내 선택하지 못했다. 예 또는 아니오로 세상만사 분명하게 보는 게 편하던 그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김이 샜다는 선배나 동급생, 말실수를 한 건지 불안해하는 후배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카게야마는 엉킨 실타래를 풀 듯 생각을 거듭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저 잠깐의 고민으로 끝나면 좋았을 것을, 그날의 여파는 그 뒤로도 카게야마를 놓아주지 않았다. 일상의 중간중간 끼어들어 되풀이되는 혼란은 제법 끈질겼다. 어린 날 무엇보다 강하게 배우고 싶다고 바라게 만든 대상 위로 새로운 이를 덧씌우는 게 가능한 걸까. 미야 아츠무에겐 마땅히 그럴 수 있는 실력이 있음은 알고 있지만, 납득하려 할 때마다 뒤에서 목덜미를 잡아채듯 막연한 위화감이 올라왔다. 이건 아닌데. 하지만 전혀라고는 못하겠고. 뭐지?
*
"다녀왔습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 집에 돌아온 카게야마는 저녁밥을 먹고 침대에 누워버렸다. 스마트폰을 만지작대던 그는 반나절 전을 되짚었다. 크게 티를 내진 않아도 간혹 고장이 난 것처럼 굴었던 자신을 보다 못한 야마구치가 슬쩍 해준 조언을 떠올린 것이다. 혼자 생각해도 모르겠으면, 관련된 당사자에게 물어봐도 좋지 않을까? 그 말이 제법 타당하다 느낀 카게야마는 그럼 누구에게 연락해야 할지를 골랐다. 오이카와와 미야, 두 사람 중 자신이 물어도 딱히 짜증이나 화를 내지 않을 법한 사람은… 아무래도 후자일 것 같았다.
이런 판단에는 미야에 대해 털어놓은 카게야마에게 그 사람도 그렇게 성격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들어 보니 너는 괜찮을 것 같다는 야마구치의 응원도 다소나마 이바지했다. 어째 파이팅을 외치는 얼굴이 미묘했지만 카게야마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 섬세함이 있었다면 진작에 답을 내렸을 거고,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터였다.
마침내 도움을 요청하기로 마음먹은 카게야마의 손가락이 연락처 옆 수화기 모양의 아이콘을 눌렀다. 스피커 가까이 가져다 댄 귀에 통화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다행히 상대는 금방 전화를 받아 주었다.
-토비오 군?
“안녕하세요.”
-네가 먼저 전화하다니 신기하네. 잘 지내는 거지? 무슨 일 있어?
“딱히 별일은 없지만 모르는 게 생겼는데요, 미야 씨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들어서요. 괜찮나요?”
-물론 괜찮지. 궁금해지는데?
깊게 숨을 들이켰다 내쉰 카게야마는 내내 저를 괴롭히던 것을 고했다.
“저에겐 따라잡고 싶은 세터가 있어요. 그 사람을 보면 떨리고, 두근거려요. 뛰어넘기 쉽지 않을 걸 알아도 도전할 겁니다. 그런데…”
-그런데?
“미야 씨에게도 비슷한 걸 느끼는데, 이건 더 몽글몽글하거든요. 오이카와 씨랑은 좀 다른 것 같은데.”
솔직한 카게야마의 말에 잠시 조용해졌던 미야가 부드럽게 부탁해왔다. 토비오 군, 가능하면 나한테 느낀다는 걸 더 자세히 말해줄 수 있을까? 카게야마는 순순히 응했다. 자신의 상념이나 감정을 분류하고 정의하는 것은 카게야마에게 있어 까다로운 작업이었지만, 해답을 원하는 마음이 더 컸던 덕에 더욱 정확하게 전하려 애를 썼다.
“같이 이야기하면 재밌어요. 가끔 왜 이러나 싶을 때는 있지만, 보통은 친절하시니까. 제가 말하면 화를 내기보단 무슨 뜻이냐고 먼저 물어봐 주시고요.”
-착한 아이한테 화를 낼 일은 적지. 그래서?
“미야 씨가 연락하면 귀찮지 않아요. 오히려 기분이 좋아져서, 힘이 나는 것 같거든요.”
어느새 카게야마는 더는 누워 있지 않았다. 허리를 곧게 펴 앉은 그는 스마트폰을 쥐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정도만 다르지 시합을 앞두고 코트에 들어갈 때와 흡사한 초조함이 발끝부터 저릿하게 올라왔다. 뱃속 아래로 불안을 억누른 카게야마는 마침내 가장 핵심이 되는 의문을 던졌다.
“저는, 누구를 동경하는 걸까요?”
카게야마는 답을 기다렸다. 간식을 든 주인이 제게 그걸 주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는 강아지와도 같은 태도였다. 헌데 분명 그 모습을 볼 수 없을 상대는 큰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농담이라도 했었나 당황하다 못해 헷갈린 카게야마에게 잠시만, 진정할 시간을 달라던 미야는 다시 입을 열었을 때도 여전히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였다.
-겨우, 드디어라고 해야 하나.
“네?”
-세터로서 다른 녀석을 의식하고 있는 건 별로지만,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다니 기쁘네.
“저, 미야 씨?”
-미안 미안. 이해하기 어려웠지? 일단, 토비오 군이 내게 가진 건 동경이랑은 좀 다를 거야.
“그래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강렬해질 수도 있어. 아직 봉오리 정도겠지만 말이야.
“아는 거면 확실하게 설명해주세요. 진지하다고요.”
듣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기색이 역력한, 애매한 설명에 카게야마는 불만을 토했다. 그를 어르고 달래듯 미야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무엇이 다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지? 이걸 전화로 하기엔 좀 그런데, 우리 조만간 만나지 않을래?
카게야마는 혼자뿐인 방에서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달착지근한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것은 상대가 저에게 해를 가할 리 없다는 순진한 믿음 때문일 것이다. 악의도 질투도 아닌 이상, 감정에 둔한 소년이 경계하기란 무리였다. 일사천리로 어디서 몇 시에 만날지 주말 약속을 잡고 그때 보자고, 잘 자라는 밤인사를 마친 뒤에야 카게야마는 미야와의 통화를 끝낼 수 있었다.
온종일 소모된 배터리가 밤중에 채워지도록 스마트폰에 충전기를 연결한 카게야마는 그제야 지친 몸의 긴장을 풀었다. 곧바로 알지 못했다는 약간의 불만족은 그보다 더 큰, 미로 안에서 저 멀리 출구를 발견한 듯한 충족감에 금방 먹혀버렸다. 베개에 털썩 머리를 누인 카게야마는 의문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마음 반, 상대를 볼 수 있다는 반가움 반인 혼잣말을 했다.
“…주말은 금방 와.”
경기가 없는데도 미야 아츠무를 만나는 것이다. 솟아오르는 가벼운 기대감에 몸을 맡긴 카게야마는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앞으로 생애 처음 겪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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