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의 닫힌 눈꺼풀 안에서 에그시가 란슬롯 후보 최후의 두 명 중 하나로 정해지고, 우열을 가리기 위해 임무에 투입되었던 그 시간은 여태 선명했다. 이제부터는 실전이라던 멀린의 경고대로,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던 임무에서 에그시와 다른 후보는 고군분투했다.
타겟은 만만치 않았고 이미 방해를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는지 비상벨이 울리고 무장한 남자들이 들이닥쳤다. 그 결과 기어코 그들이 준비했던 무기를 기어코 쓸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 오자, 지켜보던 해리는 내색할 수 없는 초조함을 느꼈다. 에그시의 부친 역시 같은 과정을 겪는 걸 보았던 탓일까. 지난날 자신의 과오가 겹쳐 보였다. 확신과 비슷한 기묘한 예감에 해리는 돌연 불안해졌다. 감정에 따라 그는 지원을 보내라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해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직 승패가 정해지지 않았음을 알았기에 그는 입을 닫았다. 아슬아슬하게 치명상을 피한 에그시의 긴박한 욕설을 들으며 해리는 뒷짐을 진 주먹에 힘을 실었다. 살이 손톱에 눌리며 생긴 둔한 통증과 함께, 빠르게 뛰는 맥박이 그의 온 몸으로 느껴졌다. 나를 실망하게 하지 마렴, 에그시. 속으로 한 문장을 되뇌며 해리는 그저 기다렸다. 그는 마지막 패를 열어 보인 도박사였다. 해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로 좁혀져있는 듯했다. 전부 얻거나, 혹은 모두 잃거나.
산발적인 총소리와 비명, 성난 고함이 섞이던 시간이 지나고 화면 속에서 에그시는 지령을 완료했다. 다른 후보 또한 곧 가능할 것 같았으나, 먼저 완수한 후보가 귀환까지 마무리하면 그것으로 시험은 종료될 터였다. 해리가 원하던 일이 이루어진 것이다. 다른 후보를 추천했던 동료의 아쉬움을 담은 한숨과 멀린의 조금 이른 축하를 들으며,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갤러해드의 작은 실험은 두 번째에 와서야 성공하는 듯싶었다.
폭발음은 갑작스러웠다.
급하게 모니터를 향한 세 쌍의 시선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부옇게 떠올라 공기를 휩쓸며 찢던 먼지 구름이 화면을 가리고 있었다. 에그시? 록시? 대답해라! 멀린이 답을 독촉했다. 응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 고요의 순간, 해리는 움직일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채 그는 시간에 박제되었다. 화질이 점차 선명해졌다. 이윽고 들려온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에그시? 에그시!
화면에 에그시의 얼굴이 보였다. 에그시가 폭발에서 다른 후보를 보호하려 위에 올라탔던 모양이었다. 간헐적으로 떨리는 숨을 타고 얼룩진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그의 몸은 더 성치 못하리라고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상황에서, 멀린은 급히 구조 요원에게 연락한 뒤 울부짖는 후보에게 지시를 내렸다. 록시, 정신 차려! 주변에 적이 남아있는지 확인하고, 에그시를 데리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라. 그리고…
*
해리 하트라는 박제는 에그시가 옮겨진 병원에 도착해서야 움직일 수 있었다. 절망이라는 방부제에 절여졌던 신체는 청년이 살아 있다는 것으로 약간의 기력을 되찾았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청년의 옆에 선 그를 보던 멀린이 괜찮을 거라는 위로를 꺼냈다. 에그시는 젊고 건강하니, 깨어나고 나면 금방 회복할 겁니다. 스스로 바라던 말을 읊던 멀린이 해리의 무감(無感)에 몸을 돌려 병실 밖으로 나설 때까지도, 해리는 침대 모서리에 손을 얹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차마 닿지 못했다.
하루, 이틀, 사흘. 지나가는 나날에 비례해 병실을 감도는 고요는 짙어져 갔다. 다른 후보, 록산느는 매일같이 찾아와 에그시가 누운 침대 옆에 있다 가곤 했다. 그런 그녀의 일정과 해리가 병실 문을 여는 순간이 겹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둘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목표를 공유했다. 그들의 하나뿐인 목적은 아직 눈을 감고 있었다. 그랬기에 둘은 서로의 눈에 담긴 죄책감과 불안이 낯설지 않았다. 저 때문이에요. 울먹이는 록산느에게 에그시는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걸 바라지 않을 거라 말하면서, 해리는 가라앉았다.
*
오랫동안 그와 알고 지낸 몇을 제외한 나머지는, 보다 폭력적이 된 해리의 임무 진행을 보며 예전 버릇이 나온다고 혀를 찼다. 지금의 해리가 익사체와 같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가 휘두르는 힘은 젊은 시절처럼의 혈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굳어가는 시체의 발악과 같은 것이었다. 달이 없는 밤의 호수에서, 그 누구도 모르게 빠져 굳어가는 눈꺼풀의 바르작거림은 무의미했다. 해리는 그제야, 느끼고 있는 것이 다시 한 번 판단을 실수했다는 죄책감 이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던 그때, 에그시는 입에 욕을 달았고 품위라고는 전혀 모르는 태도로 해리의 앞에 나타났었다. 청년의 아비는 그렇지 않았다. 해리는 청년의 부친을 마음에 들어 했고, 그가 동료로 추천받을 만큼 적합하다고 여겼다. 선하고 용감하며, 좋은 남자에게서 해리는 자신의 가치관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줄 만한 가치를 보았다. 에그시는 그렇지 않았다. 청년은 그의 아비보다 어렸고, 불안해했고, 부족했지만 그 이상으로— 사랑스러웠다.
해리는 이제 기억 속의 올리브색 눈이 누구의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완벽히 분리되었다 여긴 것은 뒤섞인 지 오래였다. 더 정확하게는, 후자가 이전의 모든 것을 덮고 재정립해버렸다. 하나로 뭉친 그것은 해리를 혼란스럽게 했고, 우울하게 했고, 때로는 분노하게 했다. 대상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서 그는 견뎌야만 했다. 다 타버렸던 불꽃이 다시금 넘실거렸다. 해리는 그것을 생사의 위험 앞에 쏟아붓는 것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난폭하고 야만적이며, 효과적인 방식으로.
해리가 에그시가 의식을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청년이 입원한 뒤 4번째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무렵이었다. 해리는 곧바로 차에 올라탔다. 지각이 일상인 사람임에도 그는 가장 빠르게 병실에 도착한 이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가빠오는 호흡을 잠시 다스렸고, 병실 문을 열었다. 해리는 자신보다 먼저 온 사람이 두 명인 것을 보았다.
침대 옆에 서 있던 록산느는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멀린은 침착한 얼굴이었지만, 해리는 그가 낭패스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침대에 반쯤 누워 있는 에그시는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미아가 된 아이처럼 눈가가 약간 붉었다. 에그시는 거의 해리 자신만큼 혼란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해리는 에그시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운 색이었다. 청년의 입술이 열렸다.
“…….”
벙긋대는 입은 소리를 만들지 못 했다. 해리는 에그시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으로 그가 하려는 말을 알았다. 해리, 해리 하트. 이름이었다. 해리는 숨을 멈춘 채,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멀린을 응시했다. 멀린은 한숨과 함께 설명했다. 아무래도 충격이 컸는지, 말을 하지 못한답니다. 심리적인 이유인 것 같다네요. 게다가 기억도 조금 혼란스러운 모양입니다. 잊은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계속 치료를 받으면 희망이 있다고 하니… 다행이죠.
피아의 너머에서 돌아온 그의 청년은 자기 자신을 구성하고 있던 두 가지가 흔들리고 말았다. 해리는 에그시에게 다가갔다. 손을 내밀자, 에그시는 맞잡아주었다. 해리는 눈을 내리깔았고, 이전보다 말라 핏줄이 돋은 에그시의 손등을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