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그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이 도시는 많은 별을 잃었다. 창문을 여니 자욱함이 묵직했고, 매캐한 회색이 코를 파고들어 재채기를 나오게 했다. 청년은 다른 누군가가 들을까 소리를 죽였고, 때문에 마땅히 재채기를 한 뒤에 와야 할, 만족스러운 시원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코를 문지르며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자리에서 고개를 살짝 드니 하늘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청년은 공기 사이로 늘어진 캄캄한 장막을 걷어내듯, 부러 손을 휘둘렀다. 닿지 않을 것을 앎에도 그는
별을 찾아대었다. 저 밑에서 흔들리는 가로등 불빛이 그가 원하는 것을 막는 듯도 싶어, 그는 결코 아래를 보지 않았다. 그렇게
오늘도 새벽을 기다렸다.
*
“미스터 언윈?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에그시는 말끔히 정리된 상담실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갤러해드, 코드네임을 이어받은 이는
과거의 무지한 상태로 머무를 수 없었다. 아마 죽기 전까지 경계하고 살피는 것이 당연할 터였다. 다행히 이 장소는 별다른 것이
발견되지 않았고, 그는 순순히 권해진 의자에 앉았다. 사이에 책상을 둔 채로 마주앉게 된 상담사가 짓는 미소가 보였다.
에그시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그 행동이 불편함을 나타낸다 생각한 것인지, 상담사는 긴장을 풀고 편히 말해도 된다 권했다. 상담은
비밀 엄수가 기본이죠. 걱정마세요. 그 말에 에그시는 속으로 비꼬았다. 글쎄요, 지금만 해도 최소 한 명 이상은 저 아래
지하에서도 알 수 있을 텐데. 상담사가 잠시 미리 접수된 서류를 뒤적이며 에그시의 상담 목적을 확인하는 동안, 에그시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멀린이나 록시가 되도록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겠다 했지만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비밀 정보
조직이 누군가의 사생활을 고려한다니, 코미디 영화에도 나오지 않을 말이다. 올 필요 없다는 자신의 등을 밀어 들여보낸 사람이 바로
그들이라면 더욱 그랬다.
“요즘 잠을 자지 못하고 있으시다고요.”
“아… 네. 엄밀히 말하면 그런 편이죠. 그다지 심각한 정도도 아닌데, 주변이 워낙 극성이라.”
“그럴까요? 사람들은 가끔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 문제를 막연하게 추정할 때가 있어요.”
잘
생각해보세요. 상담사의 눈이 둥글게 휘어진다. 에그시는 성의 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 상대에게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아쉽게도 에그시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답이 아니라 멀린과 록시였다. 등의
얼얼한 통증, 펄럭이는 서류와 함께.
*
“에그시, 넌 지금 정상이 아니야. 상담이라도 받아보는 게 어때?”
“록시, 아니 랜슬롯. 난 멀쩡하다고. 문제없어.”
“문제없다는 사람이 이렇게 눈 아래가 검어?”
에그시는 제 눈을 찌를 듯이 다가온 록산느의 손가락을 피해 재빨리 고개를 젖혔다. 그 직후 내밀어진 상대의 손목을 잡고 아래로
내리누르며, 그는 항변했다. 오, 날 장님으로 만들고 싶은 거야? 벌써 연금 받으며 살긴 싫다고. 그저 잠을 좀 설쳤을 뿐이야.
임무도 제대로 하고 있고, 주절주절 의사 앞에서 수다 떨기엔 시간이 아깝다고! 그러니 록시, 이 손 좀 내리지?
안타깝게도 에그시의 말은 그녀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록산느의 좁혀진 미간은 여전했고, 이제 에그시는 그녀의 다른 손을
경계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신참 랜슬롯과 갤러해드가 사소한 힘겨루기에 본격적으로 돌입하려는 순간, 조금 피곤한
안색의 멀린이 아슬아슬한 둘 사이의 긴장을 끊었다.
“둘 다 그만. 이제 콧물 흘리는 어린 아이는 아닐 텐데.”
““멀린!””
여긴 보육원이 아니야. 동시에 자신을 부르는 에그시와 록산느를 보며 멀린은 시끄럽다는 듯이 손에 든 파일을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둘의 시선이 고정된 사이,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어느 한쪽 편을 드는 건 아니다만, 이번은 랜슬롯이 옳아.”
“젠장! 전 정말 괜찮다고요!”
“여기 나온 네 상태는 아니라는데.”
체력이 확연히 떨어진 걸 보니 하루이틀 못 잔 게 아니겠군. 갤러해드 네가 킹스맨이 아니라도 몸 관리는 기본이야. 며칠 전 이것저것 검사를 시키더니, 그게 바로 빠져나가지 못할 덫이었던 모양이었다. 에그시는 입을 삐죽 내밀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현대판 기사라기에는 보기 힘든 그 불만 표시는 에그시에겐 맞춤 정장보다 익숙한 자세였지만, 보는 사람에게는 어쩐지 지적하고 싶게 만드는 삐딱한 심기를 풍겼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먼저 항복의 표시로 양손을 들어 올린 것은 에그시였다. 걱정을 굳이 숨기지 않는 록산느와 냉철해 보이는 멀린에게서마저 풍기는 염려를 태연히 무시하기에는, 불운하게도 그가 둘을 아꼈다.
“망할! 좋아요, 알았다고요. 그 빌어먹을 상담인지 뭔지, 받으러 가면 되잖아요!”
“옳은 선택이야. 잘 생각했어, 에그시.”
“적당한 곳을 추천해주지.”
이왕이면 예약까지 다 해주지 그래요? 비용은 백 퍼센트 킹스맨 복지 부담으로. 물론 그렇게 될 거다. 실은 날짜까지 다 정해놨거든. 그날은 임무가 없으니 편히 다녀올 수 있겠지. 태연한 멀린의 말에 에그시의 입이 벌어졌다 다시 닫혔다. 요원에 대한 킹스맨의 월권을 지적하기에는 이미 실랑이에서 진 이상, 더 질질 끌어봤자 본전도 못 찾을 것을 그는 잘 알았다.
*
“미스터?”
“아, 실례했습니다. 생각을 오래 했네요.”
그럴 수 있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상담사는 언제부터 불면이 시작되었는지 물었다. 에그시는 이것이 대화를 시작하는 물꼬를 트는 작업임을 짐작했다. 이것저것 흘러가다 실마리를 잡고 파고 들어가 답을 구하려 들겠지. 그는 전문가의 실력을 얕보지 않았으나, 과연 자신이 항복한 포로마냥 그것을 얌전히 수긍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는 회의를 느꼈다. 에그시는 티를 내지 않은 채 상대와 대화의 핑퐁을 시작했다. 이 방은 벽이 희었다. 기억을 부르는 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