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끝나고 자신이 인류의 큰 고비를 막아냈음이 분명해진 뒤, 에그시는 엄마와 데이지가 기다리는 집이 아니라 해리의 저택으로 찾아갔다. 그가 문도 잠그지 못하고 뛰쳐나갔음에도 다행히 저택은 타인의 손을 타지 않았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 앞으로 들어서며 에그시는 모자를 고쳐 썼다. 지금 그의 복장은 적의 심장부에 들이닥칠 때 입었던 것이 아니었다. 해리와 마지막 언쟁을 하던 그 차림으로, 에그시는 천천히 이전의 행동을 반복했다. 해리가 2층 계단을 내려오던 위치에 시선을 두고는 박제된 피클이 있는 곳의 문을 열었다. 미동 없이 고정된 개의 눈이 반질거렸다. 에그시는 그 눈에 비친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엔 임무를 성공했다는 고양감이나 아찔한 정사(情事)의 만족 등은 조금도 보이지 않은, 어린 청년만이 있었다.
조금은 피곤하고 가라앉아 조용한 얼굴이 어찌 보면 해리를 닮은 것도 같다고 에그시는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해리와 자신은 아무 혈연이 없는 남이 맞으니 이것은 착각에 불과할 것이었다. 그러나 에그시는 그렇게 여기고 싶었다. 자신을 끌어올려 가르치고 믿어준, 그리고 자신에게 실망한 한 남자를 아주 조금이라도 연상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 갤러해드가… 죽었으니, 그 유산은 킹스맨의 관례에 따라 처리될 거다.
― 하지만, 빌어먹을, 잠시만 미뤄 달라고요.
기쁨은 슬픔보다 짧고 옅다. 두 명이 삶의 발자국을 멈추었으나 하나는 추악한 배반을 멈추었다는 안도를 남겼고, 다른 한 명은 안개처럼 자욱한 애도를 뿌렸다. 멀린은 해리를 일컫는 호칭과 죽음 사이를 부드럽게 잇지 못했다. 그는 오랜 기간 조직에 머물렀고, 그만큼 해리와도 긴 시간 알고 지냈을 것이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에그시는 눈을 내리깐 채 멀린의 억누른 비통함을 들었다. 옆에 있던 랜슬롯은 위명 자자한 최고의 요원의 허망한 끝을 안타까워할 줄 아는 소양을 지녔기에 그저 침묵했다. 그 틈을 타 에그시는 시간을 요구했다. 새로운 아서, 수장이 선출될 때까지만이라도 기다려 달라고. 세계를 지켜낸 청년은 킹스맨의 탈락한 후보생이었고, 해리가 남긴 것 중 아무것도 탐낼 수 없는 위치였으나 그 장소에 있던 셋 모두 그 고집을 수긍했다. 에그시는 그것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함임을 알았다.
이제 청년은 걸음을 옮겼다. 사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곳을 허락 없이 들어가는 무례를 저질렀다. 분명 신사답지 못한 행동이라 지적받을 것을 알면서도 에그시는 멈추지 않았다. 서재에 발을 들이며 그는 살짝 힘을 눌러 담아 저의 이름을 발음하던, 부족함을 지탄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에그시.’
서재에는 인기척 없는 고요만이 가득했다. 안이 어두워 에그시는 등을 켜야만 했다. 그의 눈은 금방 부드러운 조명에 적응했다. 서재는 아직 먼지는 쌓이지 않아 그곳은 잠시 주인이 자리를 비운 것처럼 느껴졌다. 책장 가득 꽂힌 책들은 높이가 같았고, 눈에 거슬리는 배치가 전혀 없었다. 에그시는 위에서 세 번째에 위치한 책들의 책등을 천천히 가로로 쓸었다. 그러면서 그는 금빛으로 새겨진 제목들을 스쳐 읽었다. 다양한 작가와 장르를 불문해 모아놓음을 안 뒤에서야, 에그시는 몸을 돌려 책장 옆에 놓인 책상에 다가갔다. 결 좋은 원목의 냄새와 희미한 잉크 냄새 사이로 그보다 약한 향기가 포개어 있었다. 낯익은 향이었다. 에그시는 그것이 해리가 뿌리던 향수였음을 알아차렸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떠야만 했다. 젖은 올리브색 눈이 빛을 받아 흔들렸다.
시간은 말없이 흘렀다. 어느새 정각을 알리는 시계 소리가 열린 문을 타고 들려왔다. 에그시는 깨달았다. 책상 위를 살피고, 그 아래 수납장을 다 열어보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그것은 그가 조금 더 빠른 속도로 여러 곳을 뒤적이게 만들었다. 서재부터 시작해 부엌과 침실, 그밖에 모든 방을 전전했다. 조급함이 담긴 행동은 이 집에 어울리지 않았다. 때문에 에그시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렇게 해야만 했다.
마침내 더는 찾을 만한 위치가 없어질 무렵에서야 에그시는 힘없이 거실로 나왔다. 청년은 소파를 무시한 채 몸을 굽혔다.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세우고 그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잠시 뒤, 아주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벽에 부딪혔다. 에그시 혼자만이 존재하는 집이었기에, 안타깝게도 그 소리를 묻어줄 수 있을, 또는 그런 그를 달래줄 사람도 없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았을 울음은 오래 이어졌다.